grey room

특권이자 한계

papyrus 2010. 7. 5. 21:11


내 추상의 영역에서 형체를 띠지 않은 채 존재하던 꿈과 이상이 이 현실 세계에 사유의 육체를 입고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아마도 드물고도 황홀한 일일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뒤엉켜 떠돌고 있던 웅성거림과 소음이 하나의 음표로 소리를 내고 음악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즐거움인 것처럼. 그러나 하나의 소리가 나와 그 시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선, 추상의 영역에서 존재했던 무한한 소리들이 모두 침묵당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한계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물질적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무형의 사유조차도 항상 어떤 유형의 것--글자, 소리, 그림, 조각 등등--으로 치환한다. 그처럼 세계 안에 구체적 형체를 띤 어떤 것을 만들어낼 때,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그 어떤 것을 내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온통 혼돈으로 뒤엉켜 있기만 하던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행복한, 특권적 경험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특권인 동시에 한계다. 이 구체성을 띤 어떤 물질적 형상을 만들어내고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절대화할 위험에 곧장 빠진다. (이 일에 예외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다만 어떻게 하면 그 수렁 안으로 깊이 빠져,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경이 되지 않을 것인가를 매순간 고민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이 찾아헤매고 있다고 느꼈던 어떤 소리를 만난 음악가의 음악이, 도저히 잡아챌 수 없다고 느꼈던 어떤 감정과 상황을 마치 금방이라도 손으로 만질 수조차 있을 듯이 그려낸 작가가, 혹은 화가가 곧 자기복제의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본다. 나의 감정이, 상황이, 생각이 나 자신조차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절망하던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소리와 글과 그림 혹은 몸짓 속에서 그것을 만났을 때 그 '장인'을 숭배하는 팬이 되고, 그러다가 그가 심지어 더이상 처음의 그 소리와 글과 그림과 몸짓을 내던 그 사람이 아닐 때조차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두둔하고 정당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본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상상력, 추상의 영역에서 어떤 구체적 형상을 띠지 못한 연기와 같고 구름과 같이 뿌옇기만 하던 상상력은 육체를 얻는 그 특별한 경험, 즉 특권에 의해, 곧바로 화석이 될 운명, 다시 말해 한계에 처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어제 글의 연장선에서 말하자면, 친일파들이나 혹은 어떤 의미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처했던 위험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그처럼 똑똑했던 사람들이 '친일'이라든가 '극우'라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친일'이나 '극우'는 일종의 사후적인 명명 혹은 다른 목적을 위해 동일한 '형태'의 선택을 했던 다른 사람들과의 형태상의 동일함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혼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는 그들에게는 친일과 반일, 극우나 극좌라는 이미 정해진 두 갈래 길 앞에서의 선택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친일과 반일이라는 길이 표시되어있던 지도를 펼쳐들고 그 두 갈래 길의 갈림길 앞에 서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바로 그 길을 만들었던 당사자들이며, 그 시대가 곧 그런 길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지도가 생겨났다면 오히려, 그들이 걸음을 뗀 뒤 그 길의 자취를 보고 우리들 혹은 그 발자취를 바짝 좇아가던 사람들이 그린 것이 곧 지도가 된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엇보다 외형적으로 같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같은 무리로 묶이기 때문에 전혀 닮지 않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명명 아래 놓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바로 앞서 말했던,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라는 것이 가지는 특권이 곧 한계로 둔갑하면서 상상력과 사유, 혼돈을 아예 그 현실적 형태로 치환해 그 안에 가두어 버릴 때 그처럼 똑똑했던 사람들도 스스로 위험한 길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시적이면서도 우연적으로 경험했던 힘의 표현으로서의 일본이 하나의 거대한 표상으로 어떤 지식인들 앞에 우뚝 서게 되면서 그 일회적이고도 우연적이었던 특권은, 상상력을 말살해버리는 한계가 되어, 일본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의 힘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그것이 곧 고착화되고 화석화된 일본에 대한 숭배와 무조건적 복종으로서의 친일을 낳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힘에 대한 순수한 숭앙이 외형상 천황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동일시되고, 한번 그런 형태상의 동일성이 빚어진 이후엔, 역으로 그 외형이 어떤 순수한 이상을 삼켜 버리는 사태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내 마음을 읽은 것만 같고, 내가 할 수 없는 말을 대신 해주는 것만 같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우리들 누구라도 결코 마음을 몽땅 빼앗겨서는 안 될 동일한 위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영혼을 담보로 하는 악마와의 거래란 어쩌면 파우스트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건쯤은 사유의 육체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그 특권만을 보고 한계를 보지 못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