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떠나는 여행은 혼자일 때보다 더 모험하게 하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을 만끽하게 한다고 믿는다.
씨네21의 이다혜 기자가 쓴 여행에 대한 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의 저자 소개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사실 아직 책을 다 읽진 않아서, 이 소개글에 어떤 살이 붙여질지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에게 도드라져 보인 부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독"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독이란 나 같은 사람은 결코 즐길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다. 어차피 할 줄 아는 언어가 모국어를 제외하고는 영어와 일본어 단 두 개, 그나마도 일본어는 간신히 관광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중급 정도 수준밖에 안 되니, 그렇게 치면 결국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유럽의 일부 국가들 정도까지 범위를 약간 넓혀 볼 수는 있겠지만- 영어권 국가밖에는 갈 수 없다는 극단의 제약이 생긴다. 실제로 살면서 단 한 번, 중국의 베이징에서 혼자 시내를 하루 정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자금성이 지루할 정도로 넓은 와중에 뙤약볕이 너무 뜨거웠다는 것 말고는 뭘 봤는지 정말로 기억이 없고, 오로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의 불안감밖에 없다. (어쩌면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편견과 그 나라에 외따로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런 불안감을 더 심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지역을 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할 것이다. 음식이 중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치적인 상황, 주거 환경,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편리함, 혹은 직업적 소명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여러 측면들을 고려해 봤을 때, 나에게는 '언어'가 가장 일차적으로 떠오른다. 다만 나의 역설은 내가 상당히 과묵하다는 데 있다. 물론 나의 친구들 가운데는 나를 표현하는 데 '과묵하다'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연하자면, 나는 말을 (많이) 하는 데 대한 피로도가 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한국이 고국임에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어떤 정치, 사회적 여건들에 대해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낀다. 심지어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운명의 장난으로 이 나라에 잘못 태어난 것은 아닌지, 이보다 나와 더 잘 맞는 나라가 다른 어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객수(客愁)를 종종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사는 것을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데는 언어라는 제약 조건이 분명히 작용한다.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 하는 편에 속한다고 하는데도 영어권 국가에 자리 잡고 사는 데 대한 자신감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외국어에 불과한 영어를 매일같이 하고 그것에 부딪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주는 피로감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으로 유색인종임이 매일같이 가시화되는 조건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인종주의적 편견 또한 무시 못하겠지만.)
비교적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외국어인 영어와 모국어로서의 한국어가 내게 주는 차이는 그런 것이다. 언제든 내가 전원을 켜거나 껐을 때 소리가 들어오는 방식의 차이. 혹은 언어에 대해 전원을 끄면 되는지, 아니면 켜는 것인지의 차이.
한국어의 경우엔 내가 전원을 끄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바로 들어 오고, 차단하고 싶을 때 전원을 끄면 된다. 반면 영어는 어떤 의미에서 반대인데, 사실 내가 딱히 전원을 꺼 놓은 상태라고 할 수 없는데도 보통은 그냥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 버리고, 전원을 켠 순간엔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모든 말이 다 나에게 들어올 것이라 장담하진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닥쳐오는 피로감이 내게는 너무 크다. 물론 외국어를 배움으로써 나의 세계가 넓어지고, 언어를 배우기 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문화를 번역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다가가 하나둘씩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즐거움은 분명히 존재한다. (번역을 생계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ㅋㅋ) 그러나 알아듣기 위해 온 신경을 다 기울이고, 그럼에도 거의 모든 경우 100퍼센트 알아들을 수 없다는 한계--그런 조건에 하루 종일 둘러싸여 살고, 물리적으로그 조건을 벗어날 수 없는 데서 닥쳐오는 피로감. 이때의 노력과 피로감이 원치 않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때 전원을 끄고 차단하는 데 드는 공력보다, 새로운 언어의 습득으로 인해 넓어진 세계를 경험하는 즐거움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다.
TV의 대중 강연 프로그램에 어느 심리학자가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정확한 용어는 생각나지 않지만,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성향과 싫어하는 것을 피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누구에게나 양자가 존재하겠지만, 개인에 따라 어느 쪽 성향의 삶을 우선시해서 추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정말 싫어하는 직장 상사가 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위해 그것을 참을 수 있느냐 여부가 그 성향에 따라 갈라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싫어하는 것을 감수하는 걸 훨씬 더 못 견디는 성향이라 하겠다.
물론 우리는 같은 모국어를 말하는 사람과도 말이 안 통한다는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뭐랄까, 그 답답함은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내 언어로 다 말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답답함과는 다르다. 그 경우엔 나와 상대방의 사고의 여과장치가 달라서, 내가 한 말이 다르게 왜곡되어 버린다고 생각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오해는 그 사람의 이해 능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로 말할 때는, 상대가 나를 오해할 때, 그게 상대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있어서 내 말을 잘 못 알아 듣는다는 생각보다, 내 언어 능력의 부족함에서 온다는 자학의 감정이 자꾸 따라 다닌다. 혹은 그 부족함을 메울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이 앞선다. 안타깝게도 언어에 대한 바로 그런 나의 집착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꾸는 데 많은 제약으로 작용했지만, 아마도 이 생에 고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