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나는 김수현이 과격하거나 극단적이라고는 생각해도
급진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녀는 결코 급진적이진 않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의 이야기들은 늘
극단의 보수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뭐, 치밀한 분석의 과정을 거친 건 아니지만
그녀의 드라마들은
"완전한 사랑"이나 "청춘의 덫", "불꽃", "결혼"류의
극단적인 사랑과 결혼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목욕탕집 남자들", "사랑이 뭐길래" 등의
(그리고 최근에 이승연, 김정현, 이태란 등이 나왔던
그 드라마 뭐더라.
강부자가 할머니로 나오던 그 드라마는
하도 목욕탕집 남자들 아류만 같아서
분리돼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
가족 드라마가 다른 한 축인 것 같다.
그녀만의 색채를 절대적으로 느끼게 하는
대사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을 빼고는,
전자는 극단적으로 과감한 사랑의 형태를 보여줘서
후자의 드라마들과 전혀 다른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표방하는 세계관은
그 두 부류의 세계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그리는 김수현표 가족 드라마는
통통 튀고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마저도
늘 너무나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에게 살갑고, 어른에게 사랑받고
기본적으로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런 이상적인 가족상을 추구하는 것 같다.
급진적이라고 보이는 인물 안에서도
그녀는 이른 바 "긍정적" 보수성을 모색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물론 웃고,
"오 저렇게 말할 수도 있다니."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극도로 비현실적이라고 늘 느낀다.
그녀가 가공한 세계 안에서는
보수적 가부장제의 틀을 흔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안정적이고 완벽한 가족의 형태를
늘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전자의 극단적이고 과감한 사랑/로맨스 드라마에서도
그녀의 인물들은 늘 철저히 예.의.바.르.다.
그 인사성 바른 아이들,
시장에서 떡볶이를 파는 아줌마라도 언제나 고고하고 경우바른
그녀의 -가끔 그려지는 가난한- 여성 캐릭터들.
토씨 하나라도 고쳐서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배우들의 애드립 따위는 절대도 절대로 허용치 않는
그녀의 맛깔스런 대사들은 편안한 대화 속에서도
늘 극도의 긴장을 요구하고, 언어의 바다를 유영한다.
어차피 책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일상의 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그녀의 "까탈스러움"은 오히려
작가로서의 장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의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가끔 너무 싸가지 없는 사람들조차도
지나치게 예의가 바른 말들에만 머물러서
의아하다.
그래도 완전한 사랑,은 처음부터 무척 재미있었다.
매일 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아내의 허리를 가만히 감싸안고
드라이기의 온기와 그녀의 온기 속에
머리를 말리는 남편의 모습은
그야 말로 그림이다.
자본주의가 덫을 놓은 중산층의 가치에
맥없이 포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런 가족상을 보면 순식간에 매료되어
어느 샌가 나도 그런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가족상들은 때때로
박제같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 한 그녀의 시도는,
역시 김수현!이라는 감탄과 탄성을 주말 밤마다 절로 낳았다.
그렇지만 그녀도 역시 "가을동화"의 PD나 다름없는 감성이었나?
그리움과 고통, 긴장에 몸부림치며 발작을 일으킨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다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제목을 두고 보았을 때,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결국 완전한 사랑은 죽음으로 박제되어야만 완성되는 것인가?
진행 중의 사랑, 움직여가는 사랑은 결코 완전한 사랑일 수 없는 건가.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결말은
아내의 죽음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그 고통이 좀 희미해진 남편이,
따뜻한 봄날 오후 같은 때
아이들과 가벼운 소풍 같은 걸 나가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는 여전히 홀로여도 좋고,
새로운 사랑을 만났더라도 또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큰 사랑을 주고, 또 받았던 그가
어떻게 그 사랑이 상처가 되고, 비수가 되어
자신에게 죽음을 내리게 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야 사랑은 숭고하고 비장하게 "완성"되는 것일까?
하나의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반드시 바뀐 사랑을 메꿔 넣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단 한 번 찾아올 수도, 여러 번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횟수로 쳤을 때,
사랑을 한 번밖에 못했다는 것을 문제삼으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렇게 완벽하고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
그렇게 죽음으로 박제되거나,
다른 사랑은 결코 자라지 못하게 하는
불모지로 남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랑을 생각하는 관습과 통념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랑이 묻힌 땅 위에
새로운 사랑이 움트는 것을
마치 죄스러운 것인 양 취급하고,
진정한 사랑이나 완전한 사랑이 아닌 양 여기는 데
익숙해지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감성을 온통 뒤흔들 수 있는 정도의 공력을 지닌
김수현마저도 그런 사랑의 보수화에 공모하고 있다는 데
실망했다고 말하는 게 사실일 터이다.
시우가 살면서 한 번의 사랑을 만나고,
그녀(영애)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가 남겨준 큰 사랑이,
그 안에서 풍성하게 넘쳐나
그로 하여금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하도록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이미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에게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남기고,
딸을 잃고 마음은 폐허를 떠도는 장모님에게도 비수를 꽂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슬픔과 연민만 키워놓고,
며느리의 죽음에 무심하기만 한 얄미운 시아버지에게
끝끝내 그녀를 "아들마저 잡아먹은" 오백년 재수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고,
자기들만의 사랑을 박제해서 유리상자 안에 담아놓고 가는 것이
완전한 사랑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뭐 그런 말이란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울리는 데 갖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면
수습도 어떻게 좀 잘하기를 기대했더란, 뭐 그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