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조숙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정원(한석규)의
묘한 회상조로 시작된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너 그때 그 일 생각나니?"라는 투의 대사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오빠 정원과 함께 툇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던 여동생 정숙도,
"오빠, 아직도 지원이 좋아해?
... 그거 생각나?
옛날에 오빠 학교 다닐 때 책에다가 지원이 사진 껴놓고 다녔잖아."
라고 하고,
여름날 오후, 아마도 그의 삶에서 유일한 사랑이었을
어린 시절 첫사랑 지원과 마주 앉은 정원도
"지원아, 너 생각나니? 내가 국민학교 때 니 일기 보고 날씨 베낀 거?"
라며 오래된 일기장을 뒤적이듯, 괜시리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춰 본다.
오랜 친구 철구와 오랜만의 술자리에서도 정원은
"너 그 제대하고 쫓아다니던 그 여자 생각나니?"
......
"어휴- 그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십 년 전이다."
라며 십 년 전 어느 날로 거슬러 간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 마지막 날 했던 말까지 들춰내서
"술 먹고 죽자!"를 외친다.
그렇듯, 사그라드는 것들에 대한 관조와 회한의 톤으로 시작한 영화는
영화 전체가, 흐트러져있던 빛바랜 추억의 사진들을
사진첩에 하나하나 꽂아가며 정리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된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사람에게,
새로운 인연을 맺고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무책임하고 무모한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남은 나날들을 그래도 웃음을 지으며 살아가게 해주는 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닌 언제나 안전한 과거의 추억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추억으로만 되돌아가고 있던 정원의 삶의 시간을
현재로 되돌려놓은 것은
아무런 준비도 할 틈을 주지 않은 채, 그의 삶 속으로
불쑥 걸어들어온 다림(심은하)의 존재였다.
볕이 유난히 따가워뵈는 여름날,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그녀를 모르는 척 지나쳐가다가
스쿠터를 돌려와서는 그녀를 뒤에 태우고
괜시리 "꽉 잡아요"하며 쌩 달려보기도 하고,
비 오는 날, 간간이 어깨가 부딪칠 듯 우산을 나눠쓰며
어색한 눈빛과 웃음과 침묵을 나누고,
찾아온다고 했던 그녀를 기다리는 설렘 속에 "거리에서"를 흥얼대며
비오는 밤, 홀로 사진관을 하염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롤러 코스터를 타고
운동장을 숨가쁘게 달음박질 치고,
목욕탕에서 먼저 나와 귤 달랑 두 개를 사들고
숫기없이 서성이며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를 데려다 주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귀신 얘기를 해줄 때
슬며시 팔짱을 끼는 그녀 앞에서, 순간 말을 더듬는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는
사랑을 시작할 때의 모든 서툴고 설레는 감정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온전히 살아간다.
그렇게 미래를 그려볼 여력조차 없고,
오로지 회상해야할 아련한 과거만이 있는 정원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인 것은 다림뿐이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일 뿐인 그는
모든 것이 처음인 듯한 그녀, 다림하고 만큼은
매순간, 마지막이 아닌 처음을 함께 했다.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예정된 죽음 앞에서
놀라울 정도의 담담함과 차분함을 보여주면서도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감추어져 있던
그의 사소한 행동들 속에서
그를 향한 안타까움과 애잔함을 느끼며,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가
그가 두고 가야할 삶의 기쁨 앞에서도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본 이 영화는,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으면서도,
한결같이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을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의 막바지에 다다라
남은 것은 추억 뿐이라고 체념한
바로 그 찰나,
삶은 말한다.
살아가는 한,
삶은 추억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살아가는 한,
삶은 오직 삶일 뿐이라고.
살아있는 이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그 어떤 무책임함도 무모함도
물을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일까.
도입부에서는 "사라져 버림"을 이야기하던
정원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떠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