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Lost and Delirious

review/movie 2006. 1. 4. 16:38

사립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고생들의
열정, 사랑, 비극과 화해의 이야기랄까.
몇 년 전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빌려온 디비디를 봤던 기억은 나는데,
우리말 제목은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영어 제목은 뭐랄까, 심하게 직설적이랄까, 적나라하달까.


"코요테 어글리"에서 컨츄리 음악 작곡가가 되기 위해
컨츄리 음악의 성지인 내쉬빌로 상경한 소녀(?)를 연기했던
파이퍼 페라보(Piper Perabo)가
그 작품에서의 희망에 찬 캐릭터를 버리고
거의 180도 돌변한 불안하고 예민한 십대의 주인공
폴린 (폴리) 오스터 역.
그녀의 object of affection이자 단짝 친구 빅토리아 (토리).
그리고 이젠 OC로 미국 내에서 지명도와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미샤 바튼이 어리벙벙한 전학생 메리 (마우스) 브래드포드를 연기했다.

미국 영화에서 명문 사립고는 주로 미국의 보수적 가치가
가장 극단적으로 주입되고 강요되는 곳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 영화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 영화에서 상황이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이유는
주인공 폴리의
불운한 가정사가 그녀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과 복잡하게 얽혀
어찌 보면 열정적이고, 어찌 보면 불안정한 그녀의 감성이
자신의 단짝친구 "토리"에게로만 향해 버린 데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십대의 미혼모로 추정되는 생모에게서
나자마자 버려져 입양이 되고,
입양된 가정에서도 결국 골치거리 취급을 받으며
기숙학교로 보내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입양을 주선한 기관을 통해
어렵게 찾아낸 생모에게 만나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썼지만
결국 거절 당한 것도 그녀에겐 굉장한 충격을 더했었다.)

결국 폴리의 우정은 우정에서 그치지 않는데,
교과서 같은 삶만을 살아온 보수적이고 여린 토리는
우정을 넘어선 폴리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밀쳐내게 되면서
이 어긋남은 예정된 불행을 향해 치달아 가고...

사건상으로 이 영화의 결말은 기억이 나는데,
그 사건을 받아들인 토리의 감정이 어떻게 매듭지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며 혼란스러웠던 나의 감정은
어느 곳에도 마음이 머무를 곳 없이
끝내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여긴
폴리의 극단적인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면서도 보수적인 사회의 관습 앞에서
비겁하게 사랑하는 이에게 등돌리며 느꼈을 토리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사랑이 왜 그런 것이어야만 하는 걸까, 싶은
불가해한 것 앞에서의 끝없는 의문이었던 것 같다.
왜 그녀만이어야 하고,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왜 또 그 마음을 다독이지 못한 채,
유일한 선택지는 등을 돌리는 것 밖에 없었는지.
"lost and delirious"하다는 제목 역시
나와 같이 그런 의문을 품는 입장에서 붙인 건가.
그런데 이건 이미 서른 즈음의 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평범한 열일곱 여고생들의 마음을 염두에 둔 건 아닐지라도
열일곱 여고생 마음이라면 극단적인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돌이켜 보면, 호르몬 불안정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로서는 때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아주 극적으로 "절교" 같은 걸 선언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를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양 여기기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나 수업 시간을 틈 타
교과서나 문제집 아래 편지지, 연습장을 숨겨놓고
하루에도 몇 통씩 끔찍이도 센치한 편지를 써대기도 하고.
남자아이들보다 보이쉬한 여자 선배들, 동기들에게
왠지 더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아무리 낭만의 색채를 덧입혀 기억에 담아두어도
지나간 시간은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이라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그 시절에 그랬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줄 한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있었어야 했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
근데 정말이지 이 영화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어수선한 데서 되게 정신없이 한 번밖에 못 봤던 영화였는데
어제 잠들려고 뒤척일 때 문득 생각났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