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삼가다

to a t 2004. 1. 9. 23:53
내가 일생동안 보아온, 가장 많이, 자주 틀리는
그러면서도 공공장소에서 어김없이 쓰이는 동사 표현이
바로 "삼가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안내문에 많이 들어가는 동사표현이기 때문.

-건물 내에서 흡연을 "삼가해 주십시오."
-기차에서 떠드는 행위를 "삼가하십시오."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안내문이나 안내표지만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삼가하다"라는 동사는
우리말 어휘에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표현이다.
그것은 바로 "삼가다"의 잘못된 표기.


삼가다,는 동사는
"(무엇을 꺼리어) 조심하여 피하거나, 하지 않다. "
라는 뜻으로 대부분 사람들에게 완곡한 주의나 경고, 부탁을 할 때
정말정말 자주 쓰이는 표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를 "삼가하다"로 완전히 잘못 알고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하다"형의 동사나 형용사가 워낙 많다 보니
헷갈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부하다, 구경하다, 다림질하다, 건강하다, 순수하다 등)
웬만한 명사에 "-하다"만 붙이면 용언이 되는 표현들이
허다하다 보니 "삼가"라는 어휘에 "-하다"를 붙여서
동사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든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에 쓰이는
"삼가"란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히"라는 뜻이 있으니
삼가다,라는 동사 표현과 상통하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삼가"란 그 단어뜻에서도 엿볼 수 있듯
명사가 아닌 부사다.
"-하다" 동사/형용사가 명사에 "-하다"를 결합하여
동사/형용사가 된 점을 감안할 때
"삼가"라는 부사에 "-하다"를 붙인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


그러니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을 삼가해 주십시오."란 표현은
"흡연을 삼가 주십시오"라고 써야 하고,
"기차에서 떠드는 행위를 삼가하십시오"는
"떠드는 행위를 삼가십시오"라고 써야 맞는 표현이다.
사극에서 곧잘 나오는 예를 생각해 보자면,
"대감, 말씀을 좀 삼가세요."
같은 표현도 있을 것이다.


엄연히 "삼가다"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그 표현이 결코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는 무수한 경우들을 보면,
나는 사실 이런 어휘가 원뜻을 잃고
한글 맞춤법 개정안에 의해 또 다시 우리 어휘에서 사라져 버릴
그리고는 잘못 써온 "삼가하다"로 대체되어 버릴
불운한 운명에 처한 어휘가 아닌가 싶어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제는 언어를 정화해야 한다는 강압적 주장보다는
언어에도 역사가 있고, 변해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많이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 되었지만
자발적인 언중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언어사용에 의한
자연스러운 언어의 변화 과정의 일부로써가 아니라
언중들의 무지로 인해,
제대로 된 표현이 잘못된 표현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볼 때면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제 "삼가하다"라는 잘못된 동사 표현의 사용은
철저히 "삼가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다.


@ 드라마에서도 종종 "삼가다"를
"삼가하다"로 잘못 말하는 표현들이 눈에 띄는 경우가 있는데,
배우들의 입버릇에서 나온 실수일 수도 있겠으나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작가들마저 이런 지경이라면
이것이 바른 표기대로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건
이제 무리겠다 싶은 생각마저 든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