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음. (줄거리 노출 안 시키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싶은데, 항상 쉽지가 않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보면서 '메릴 스트립이 저렇게 예뻤던가!'라는 생각에 몹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보았을 때만 해도 이미 내겐 중견 배우(좀 심했나?)의 인상을 주었던 메릴 스트립은, 연기력은 뛰어난지 몰라도 미모가 출중한 배우는 아니었다. 게다가 전성기 때의 '미모'를 자랑하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녀는 외모로 보면 이미 많이 지고 들어가야 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랫동안 그녀가 배우가 된 것은 순전히 연기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죽어야 사는 여자> 같은 영화에 그녀가 나온 걸 봤을 때는, '저 사람 어딘지 괴기스러운 구석이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보게 된 그녀는 '청초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외모였다.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도는 훨씬 더 상승했다. 한때 예뻤다고 해서 지금 다시 예뻐진 것도 아닌데, 왜 그 사실 때문에 지금의 모습까지 더 좋아하게 되는지, 나의 이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본 이후, 메릴 스트립의 영화를 좀 더 관심있게 보게 되었다. (다이앤 키튼도 뒤늦게 <애니 홀>을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경우 중 하나였다.)
암튼 <줄리 앤 줄리아>가 그런 연유로 보게 된 영화 중 하나다. 일단 눈을 즐겁게 해주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하는 '요리 영화'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경로로 접했던 총평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데다,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라고 하니 한 번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과연 요리 영화이기도 하고, 메릴 스트립 주연 영화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멘토'과 '블로깅'에 관한 영화, 즉 마음의 스승을 벗삼아 글쓰기라는 자신의 영역을 만나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영화였다.
불교에는 '줄탁동시(啐啄同時)' 혹은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상황을 비유한 표현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선 우선 병아리 자신이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야 한다. '줄(啐: 우는 소리 줄)'이란 글자는 바로 이처럼 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 안쪽에서 알껍질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병아리 혼자서 알을 쪼고 안에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알이 깨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때 어미닭이,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데, '탁(啄: 쫄 탁)'이 곧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줄탁동시'란 바로 이처럼 그 두 가지 행위가 동시(同時)에 혹은 같은 계기[同機]에 일어나야 병아리 한 마리가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상적인 사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이것을 줄여서 '줄탁'이라고도 한다.
인생에서 멘토란 존재, 그리고 멘티로서 자신이 배움을 얻고 세상을 여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급 공무원으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주인공 줄리가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책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줄리아 차일드와 만난 방식이다. (스포일러가 될 것은 알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여기서 '만남'은 축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만남'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는 1949년의 줄리아 차일드와 2002년의 줄리 파웰의 삶이 교차편집해서 등장한다. 1949년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 살게 되면서 프랑스 요리와 사랑에 빠져 명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이후 최초로 (공저이긴 하나) 영어로 된 프랑스 요리책을 내고 직접 프랑스 요리를 가르치면서, 미국에 프랑스 요리를 전파한 전설의 미국인 프렌치 셰프, 줄리아 차일드의 삶. (헥헥- 숨차다^^;) 그리고 2002년을 살아가고 있는 줄리 파웰은, 어쩌면 줄리아 차일드와 비슷하게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사를 하게 되지만, 그것은 삶의 질이 올라가는 선택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쾌적했던 뉴욕 브루클린에서 퀸즈로 강등되어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급 공무원으로서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 함몰하며 대학시절 꿈이었던 작가로서의 삶은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게다가 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오래 알아왔다는 이유로 삶의 기준이나 방식도 완전히 다른 '엄친딸' 친구들과 갖는 정기적인 모임에서, 돌아가면서 해대는 그들을 자랑질을 참고 들어주는 고문을 당하며, 점점 깊은 자괴감에 빠져 평범하다 못해 루저(loser)로 전락해가는 듯이 느껴지는 줄리 파웰의 삶. 이 두 사람의 삶은 좀처럼 접점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괴감과 일상에 함몰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줄리가, 꼭 책을 내지 않아도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쓸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격려하는 남편의 지원에 고무되어, 작가로서의 꿈을 현실에서 펼쳐볼 용기를 내면서 그들의 삶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냥 무작정 일상을 기록하는 대신, 자신이 평소에도 일상의 비루함에 초라해질 때마다 그 책에 실린 프랑스 요리를 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되찾곤 했던, 줄리아 차일드의 <프랑스 요리 예술 마스터하기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에 실린 524개의 레시피를 365일동안 전부 시도해보는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그 여정을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이 1년짜리 '줄리/줄리아 프로젝트'는 활력도 목표도 없던 그녀의 삶에 열정과 방향성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녀의 블로그는 서서히, 그러나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다.
그러나 누가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발벗고 나서서 시작한 일들이 종종 그러하듯, 어느 새 이 일은 주객이 전도가 되어 그녀의 삶을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과 남편의 삶의 기쁨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점점 그 본래 취지를 망각한 채 일종의 집착이 되면서, 직장생활과 블로그 운영을 동시에 해야 하는 고충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간다. 그리고 마침내 인기 블로거가 되면서 기대했던 편집장과의 만남이 무산돼 버리면서 그녀의 짜증은 폭발한다. 허나 그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글 쓰고 요리하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 새 주변 사람과 바깥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한 하나의 노동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러나 줄리는 자신이 단지 성공적인 요리 한 가지를 완성하거나, 잘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줄리아 차일드의 레시피를 시도함으로써 그녀를 멘토 삼아 요리를 향한 열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자 했던 그녀의 삶을 배우고자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 영화 속 '멘토'인 줄리아는 단 한 번도 줄리를 직접 지도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멘토'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줄리가 줄리아를 '멘토'라 지칭한 장면이 나온 것 같은데, 사실 내 기억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긴 하다.) 도리어 영화 막바지에 줄리의 요리 블로그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줄리가 신문에까지 실린 뒤, 온갖 출판사에서 빗발치듯 걸려오는 전화들 가운데 줄리아의 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통해 전해진 줄리아의 심경은, 줄리의 그런 경박한 시도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처음엔 못내 실망했던 줄리는 '그 줄리아'의 생각에 자신이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녀의 줄리아는 처음부터 줄리의 상상 속 줄리아였지만, 실제적으로 줄리의 삶을 구제(?)하고 성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그녀에게는 고마운 존재였으며,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존재를 무결점의 존재로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의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사람과 '만나는' 것이며, 그 사람으로부터 배움을 구했다는 의미에서 '스승'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이미 그는 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도와 바깥에서 알을 쪼아준, '줄탁'의 스승인 셈이다.
물론 줄리아를 직접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진 않았겠지만, 애초에 팬으로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거나 그녀에게 승인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를 자기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끄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승은 제자의 요청을 통해 제자와 만나고 그 만남이 그들을 사제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뒤엔 스승은 무엇보다 제자가 스승만을 만나고 스승만을 통해 세상을 보게 만드는 대신, 스스로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사방이 막혀있던 자신의 삶으로부터 출구를 찾아야 했을 때, 줄리의 줄리아는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줄리에게 출구가 되어주었고, 그런 의미에서 멘토가 되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줄리는 자기의 협소하고 폐쇄된 세계를 뚫고 나와 세상과 만났다. 그것으로도 그녀, 줄리에겐 족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또 다른 재미는 바로 '블로그'라는 글쓰기 매체이자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블로그가 줄리에게는 '책'이라는 좀 더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글쓰기 매체로 건너가는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출간과 그 이후의 삶이 아니라 출판계약까지의 과정만 나오는 이 영화는 블로그라는 매체를 통해 21세기의 인간이 세상과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삶이 변화하는 과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를 통해 많은 방문객을 얻고 소위 인기 블로거가 된다는 것이 물론 즐거울 수도 있다. (물론 매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ㅋ) 그러나 블로그에 글을 쓰고 금방 달린 댓글에 희희낙락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과의 만남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관계의 결이 더 풍성해지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다.
물론 그런 존재가 없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줄리의 삶을 통해서 보자면, 댓글을 단 자기 블로그의 구독자와의 관계 같은 것이 나오진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삶의 풍성함은 항상 자신이 의존적이기만 하던 남편과의 관계가 바뀌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자신이 한 음식을 먹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좀더 당당해지는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뀌는 것을 통해 보여진다. 이는 아마도 블로그란 공간이, 사람들이 블로그 방문객 수를 헤아리는 데만 연연하거나, '책'이라는 정통적인 매체를 향한 일방적인 구애에만 매달리는 대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쁨과 생동감을 얻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그것은 곧 블로그를 통해 저 세상 밖에 흩뿌려져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기뻐하기 이전에, 자신을 만나고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줄리의 '줄리/줄리아 프로젝트'가 줄리아의 승인을 얻는 것과 무관하게 줄리의 성장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줄리아 차일드가 세상을 뜰 때까지 줄리가 그녀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해도, 좌절할 일이 아닌 것처럼.
@ 그러나 이 영화는 강렬한 아름다움, 미묘한 감성, 낯선 감각 같은 걸 보여주는 새롭고 충격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잔재미는 있었지만, 아마도 TV에서 방영해주는 걸 우연히 보게 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두 번은 보지 않을 법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