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히스 레저의 유작이란 말에 기대를 했으나 기대했던 것보다 별 재미가 없었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엔 그래도 재밌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상상극장'이라는 유랑극단의 단장(?)이 되긴 전이었던 수백 년인지, 수천 년인지 전에는 어떤 수행 집단의 수도승이었던 파르나서스 박사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했던 수행이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이야기를 쉬지 않고 암송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멈추면 세상이 끝나버릴 것이라고 스승으로부터 배웠고, 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수행을 해나갔다.
그런데 어느날 불쑥 그곳에 나타난 악마가 '과연 당신들이 이야기를 멈춘다고 세상이 끝날까?'라면서 마법을 부려 그들 모두의 입을 꿰매 버렸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악마는 '당신들의 수행은 가짜'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파르나서스 박사는 '이것은 단지 우리들이 아니어도 세상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며,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끝을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 이야기로 인해 이어져가는 세상. 아마도 맞는 말일 거다. 최소한 '인간' 세상에 어떤 이미지를 부여한다면, 틀림없이 그런 것일 게다. '인간 문명'의 표지 가운데 -역사와 문학, 신문이나 영화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음악과 미술조차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이야기'가 아닌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세상은 멈출 것이고, 세상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면 아마 그건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는 말이 더 무섭다. 마치 아무 의미없는 듯 흩어져가서 떠돌던 말들이 누군가에게 가서 부딪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할 수도 있다. 꿀의 위치를 다른 꿀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꿀벌들이 추는 '8자 춤' 같은 것과 달리 인간의 언어는 하나의 기호가 반드시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과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정말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말을 해 버리면, 그게 실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한 마디를 꺼낼 때도 항상 몇 번을 생각했고, 생각없이 말이 먼저 나와버리고 나면 발등을 찍을 듯이 후회하고 후회하던 날들이 있었다. 사소하게는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가게 됐을 때, 그 사실을 몇 달이나 전에 미리 알고 있었지만, 거의 직전이 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 그런 일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 사이에 없었던 일이 돼서 내가 거짓말을 한 꼴이 되는 게 싫기도 했고,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나면 정말 가야 하는 게 실감이 날 것 같아서 싫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험담을 듣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옮기는 일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나날들이 그랬다.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그것이 현실로서 힘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게 되는 것이 싫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이라도, 때로는 어떤 이야기들을 듣고,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나?'라는 의심 혹은 의문을 제기하게 되기도 한다. 말이란 그런 효과가 있다. 그건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이 믿는 만큼 믿음이 강한 존재가 아닌 탓일 수도 있고, 사람이란 본디 한 가지로 규정될 수만은 없는 복잡다단함을 지니고 있어 각자 자기 마음이 규정해온 특정한 모습으로 그 누군가가 행동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일 것이고, 심지어 그 어떤 행동을 했을 때조차도 사람들이 속단하는 그런 이유만으로 그리 행동하지는 않은 이유도 있기 때문일 터이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저 사람들이 말을 좋아한다는 것이 유일한 화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미 마음 한 구석에 흠집이 생겨버린다면 그것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해도 아예 없는 것이 되긴 어렵다. 어차피 세상엔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좋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내겐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관계란 각자의 문제와 관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엉키기도 하고 달라질 수 있기 마련이다. 거기다 내 말까지 보태서 관계들을 더 끈적끈적하게 엉기게 하는 짓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다만 사람들에겐 모두 각자 배설구가 필요할 때도 있고, 그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다면, 그 때만큼은 난 사람이 아니라 땅 속에 판 구멍이 되어 영원히 그 비밀을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지금의 나는 느슨해지고 부주의해지고 조심성이 없어져 그런 생각을 진득하니 붙들고 있질 못한다. 그리고 그 느슨한 생각의 틈으로 생각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지금도 여전히 말에는 육중한 실제성이 있고, 그래서 내가 뱉었던 부주의한 말들, 내가 생각없이 옮겼던 다른 사람의 말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 내게 돌아와 나를 후려치고 지나간다. 세상에 말처럼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것이 또 있을까. 아무런 무게도 질량도 형태도 가지지 않았으면서 그처럼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고 두들겨패고 갈가리 찢어놓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제 더 이상 말에 두들겨 맞으며 살고 싶지 않다. 말로 다른 사람 후려치는 것도 그만 하고 싶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제의 역설은,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닫고 말을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거나 해결책이 아니라, 말을 그만큼 더 무거운 것으로, 말의 실제성을 그만큼 더 육중한 것으로 느끼고 '말을 해야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또 이렇게 세상 속에 말 한 마디를 보태며, 나는 이 말이 나에게 망치가 되어 돌아올지 향기가 되어 돌아올지, 여전히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불쑥 그곳에 나타난 악마가 '과연 당신들이 이야기를 멈춘다고 세상이 끝날까?'라면서 마법을 부려 그들 모두의 입을 꿰매 버렸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악마는 '당신들의 수행은 가짜'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파르나서스 박사는 '이것은 단지 우리들이 아니어도 세상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며, 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끝을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 이야기로 인해 이어져가는 세상. 아마도 맞는 말일 거다. 최소한 '인간' 세상에 어떤 이미지를 부여한다면, 틀림없이 그런 것일 게다. '인간 문명'의 표지 가운데 -역사와 문학, 신문이나 영화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음악과 미술조차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이야기'가 아닌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세상은 멈출 것이고, 세상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면 아마 그건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는 말이 더 무섭다. 마치 아무 의미없는 듯 흩어져가서 떠돌던 말들이 누군가에게 가서 부딪칠 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할 수도 있다. 꿀의 위치를 다른 꿀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꿀벌들이 추는 '8자 춤' 같은 것과 달리 인간의 언어는 하나의 기호가 반드시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과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정말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말을 해 버리면, 그게 실제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한 마디를 꺼낼 때도 항상 몇 번을 생각했고, 생각없이 말이 먼저 나와버리고 나면 발등을 찍을 듯이 후회하고 후회하던 날들이 있었다. 사소하게는 초등학교 때 전학을 가게 됐을 때, 그 사실을 몇 달이나 전에 미리 알고 있었지만, 거의 직전이 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이 그런 일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 사이에 없었던 일이 돼서 내가 거짓말을 한 꼴이 되는 게 싫기도 했고,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나면 정말 가야 하는 게 실감이 날 것 같아서 싫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험담을 듣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옮기는 일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나날들이 그랬다.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그것이 현실로서 힘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게 되는 것이 싫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이라도, 때로는 어떤 이야기들을 듣고,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나?'라는 의심 혹은 의문을 제기하게 되기도 한다. 말이란 그런 효과가 있다. 그건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이 믿는 만큼 믿음이 강한 존재가 아닌 탓일 수도 있고, 사람이란 본디 한 가지로 규정될 수만은 없는 복잡다단함을 지니고 있어 각자 자기 마음이 규정해온 특정한 모습으로 그 누군가가 행동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일 것이고, 심지어 그 어떤 행동을 했을 때조차도 사람들이 속단하는 그런 이유만으로 그리 행동하지는 않은 이유도 있기 때문일 터이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저 사람들이 말을 좋아한다는 것이 유일한 화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미 마음 한 구석에 흠집이 생겨버린다면 그것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해도 아예 없는 것이 되긴 어렵다. 어차피 세상엔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좋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내겐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관계란 각자의 문제와 관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엉키기도 하고 달라질 수 있기 마련이다. 거기다 내 말까지 보태서 관계들을 더 끈적끈적하게 엉기게 하는 짓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다만 사람들에겐 모두 각자 배설구가 필요할 때도 있고, 그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다면, 그 때만큼은 난 사람이 아니라 땅 속에 판 구멍이 되어 영원히 그 비밀을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지금의 나는 느슨해지고 부주의해지고 조심성이 없어져 그런 생각을 진득하니 붙들고 있질 못한다. 그리고 그 느슨한 생각의 틈으로 생각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지금도 여전히 말에는 육중한 실제성이 있고, 그래서 내가 뱉었던 부주의한 말들, 내가 생각없이 옮겼던 다른 사람의 말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 내게 돌아와 나를 후려치고 지나간다. 세상에 말처럼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것이 또 있을까. 아무런 무게도 질량도 형태도 가지지 않았으면서 그처럼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고 두들겨패고 갈가리 찢어놓는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제 더 이상 말에 두들겨 맞으며 살고 싶지 않다. 말로 다른 사람 후려치는 것도 그만 하고 싶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제의 역설은,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닫고 말을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거나 해결책이 아니라, 말을 그만큼 더 무거운 것으로, 말의 실제성을 그만큼 더 육중한 것으로 느끼고 '말을 해야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또 이렇게 세상 속에 말 한 마디를 보태며, 나는 이 말이 나에게 망치가 되어 돌아올지 향기가 되어 돌아올지, 여전히 판단이 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