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반작용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수 때문에 이런저런 정치적 관심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상황에서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을 놓고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고 논쟁하는 '태도'의 문제에 자꾸 관심이 간다. 그래서 매우 생뚱맞지만 우리 나라 드라마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부모가 반대한 사람과의 결혼'이라는 문제를 예로 들면서 예전에 벨로가 썼던 글이 떠올라서 그걸 생각의 실마리로 삼아 이야기를 꺼내 본다.
첫 회부터 아주 막무가내로 '산으로 가는' 컨셉이었던 드라마이긴 했지만 "브라더스 앤 시스터즈(Brothers and Sisters)"가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짚고 넘어가기는 한다. 다른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진보정당 성향인 가정에서 굳건하게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 공화당의 지지자인 딸 키티와 그 외 가족의 관계가 그렇다. 서로 진심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믿고, 따라서 상대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선 서로를 신랄하게 '까대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가치평가' 역시도 개입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상대의 선택을 '존중'한다.
전에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를 봤을 때도, 난 참으로 엉뚱하게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였던, 낯선 사랑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는 제시카의 모습보다, 능력있는 유태인 남자와의 결혼만을 기대할 거라고 생각했던 고루한 어머니가 실은 동성애라는 반관습적인 딸의 선택까지도 완전히 지지하는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그 때 나의 시선은 분명 딸 제시카의 그것이었다. 내가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부모님이 나를 이해해'주실' 것인가, 내가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인가가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아직 애는 커녕 결혼할 사람도 없으면서, 그래도 나이가 드는 탓인지 나는 이제 문득문득 그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단지 보수적인 부모가 자식들의 진보적 선택을 낯설어하는 것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뭐 그리 대단한 정치적 지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보다는 좌파라든가 진보 성향에 대해 우호적인 경우 우리는 자신이 상당히 개방적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진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상상해 봤었다. 벨로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선택을 그렇게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예의다. 그러나 다분히 진보적인 성향에 대해 우호적인 나에게 만약 보수 성향의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과연 내멋대로 주형(鑄型)을 떠 그 아이를 그 안에 들이붓지 않고,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사실은 의문이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해주겠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저 내가 존중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진보적이거나 급진적 성향들에 대한 이해를 해주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만약 내 아이가 세계는 지금 고삐풀린 광란의 도가니이고, 자신은 그런 세계에서 '원칙'을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과연 내가 누리지 못한 걸 넌 꼭 누리게 해주리라는 마음으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척 하면서 사실은 그 때문에 자식을 구속하기도 하고, 자식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심지어 상대가 나를 존중해'주지' 않을 때조차도 나는 여전히 상대를 끝까지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역시 있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것이 거래나 교환의 대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나를 존중한다면, 나도 너를 존중해주겠다.'라는 태도를 취할 경우엔 결국 상대가 시작하기 전엔 그 누구도 먼저 행위하지 못하게 되는데, 양자가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이라도 '당신이 나를 존중하는 것 여부와 무관하게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 왜냐면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먼저' 행위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존중한다는 것은 사실 철저히, 상대가 그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심지어 상대는 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거야 뭐가 어려운가? 그건 어차피 자신의 생각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어쨌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쟁점을 놓고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혀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도대체 왜 항상 상대의 '윤리성'을 문제삼는 것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데까지 가는 진흙탕 싸움으로 가고 마는 것인지, 그런 기본적 '존중'에 대한 의식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소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도 있는 삶을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프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로 할 수 있는 차원에선, 다른 사람의 삶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차원에선 여전히 쉽다. 여전히 문제는, '나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