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사람의 직업상의 이유로 필연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뭔가 자기자신을 내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조차도, '수줍은' 사람이 좋다. 음악가를 예로 든다면, 그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너무 수줍고 부끄러워서 끝내 세상에 자기 음악을 내놓지 않았으면 그의 음악을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 내 삶은 훨씬 더 불행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이 좋다. 그리고 사실 그럴 경우 그가 얼마나 힘들게 수줍음을 무릅쓰고 세상으로 나왔을지 이해가 되고, 그걸 무릅쓰고서라도 나와서 내게 좋은 음악을 선물로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안쓰러움과 고마움 때문에 더욱더 그의 '수줍을 권리'를 인정해 주고 싶달까.
사실 4집 레미제라블이 -다른 사람들에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들은 이후 다시 들어보진 않았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루시드 폴 홈페이지에 갔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글 찾아읽다가 그가 인터뷰를 했던 -엄밀히 말하면, 하다가 말았던- 어떤 날의 단상에 대해 쓴 글을 봤다. 평소에도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떤 인터뷰어의 질문에 너무나 상처를 받아서 인터뷰를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둬 버린 사건에 대해 쓰고, '앞으로 다시는 인터뷰 따위/ 하지 않기를.'이라고 맺은 그 글을 보면서 뭔가 나도 울컥하고 마음이 아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울컥했던 건 이 포스팅 때문.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피곤함도 피곤함이지만, 개인적으로,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도 너무나 충분히 시끄러운데, 내가 또 거기 한몫 한 것 같다는 생각 들면 정말 기분 더럽다. 루시드 폴도 그렇고, 이병우나 대미언 라이스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그렇게 수줍다는 점에서 비슷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다. 대미언 라이스는 공연장에선 안 봐서 어떤지 잘은 모르겠지만, 음악을 그만 두고 싶어진 계기에 관해 이야기했던 인터뷰를 봐서는 비슷할 것 같고. 이병우는,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갔던 공연에서였던 것 같은데, 자긴 사실 콘서트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가급적 콘서트 자주 안 하려고 한다고 뭐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고 하기엔, 그 사람 글을 전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당당히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모리스 블랑쇼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도, 초기에 저널리스트로 일을 했던 몇 년 간을 제외하곤 평생 자신의 저술활동 이외의 그 어떤 외부의 공식활동을 하지 않았고, 인터뷰나 사진촬영 따위도 하지 않을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은둔한 채 오롯이 자신의 책과 글을 통해서만 세상에 말을 건넨 사람. 그냥 음악이란 거 혹은 글이란 거, 자기 안에서 터져나오려는 들끓는 웅성거림이 있어서, 그래서 자긴 그저 그 터져나오는 소리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느라 글쓰거나 연주하거나 노래할 뿐인데, 그로 인해 사람들 많은 데서 뭔가를 해야만 하는 버거움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동으로' 따라오고, 심지어 그 때문에 음악과 글을 쓰는 것 외의 많은 것에까지 얽혀야 하는 그 시끄러움. 얼마나 싫을까.
그래서 그런가. 난 왠지 그런 사람들의 숫기없음이나 수줍음을 존중해주고 싶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음악으로'만' 그 사람을 만나고, 뭐 혹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라면(^^) 스케이트를 통해서 그(녀)를 만나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장 쓰고 싶은 글로만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뭐 자기도 다 벌어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세상밖에 나온 거니까, 어차피 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 사람이 자신과 실제로 '일상'을 공유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그토록 많은 일상의 내밀함과 삶의 순간들까지 전부 나누겠다고 동의한 적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쑤셔보고 쿡쿡 찔러볼 권리 따위 허락한 적은 더더욱 없거니와.
간혹 누군가를 집어 '공인으로서의 책임' 운운하는 말 미디어에서 쓰는 거 볼 때, 내가 다 불쾌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인정을 해주고 나서,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거론하는 건가. 법적인 권리의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있는 건가. 캐나다에 있으면 길거리를 그냥 걸어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 김연아 인터뷰 보면서 무척 안타까운 기분 들었었는데.
어떤 사람들 보면, 그 사람이 그저 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목소리나 손짓, 몸짓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나눠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유 하나도 필요 없이, 너무 고맙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끄러움에 생채기가 너무 많이 나서 다시 자신의 달팽이집 속으로 돌돌 말아 들어가버려 그의 음악이나 공연이나 책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스러운데. 그런 건 조금도 헤아리지들 않는 사람들 보면 가끔은 내가 더 답답할 따름.
사실 4집 레미제라블이 -다른 사람들에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들은 이후 다시 들어보진 않았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루시드 폴 홈페이지에 갔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글 찾아읽다가 그가 인터뷰를 했던 -엄밀히 말하면, 하다가 말았던- 어떤 날의 단상에 대해 쓴 글을 봤다. 평소에도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떤 인터뷰어의 질문에 너무나 상처를 받아서 인터뷰를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둬 버린 사건에 대해 쓰고, '앞으로 다시는 인터뷰 따위/ 하지 않기를.'이라고 맺은 그 글을 보면서 뭔가 나도 울컥하고 마음이 아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울컥했던 건 이 포스팅 때문.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피곤함도 피곤함이지만, 개인적으로, 세상은 이미 그 자체로도 너무나 충분히 시끄러운데, 내가 또 거기 한몫 한 것 같다는 생각 들면 정말 기분 더럽다. 루시드 폴도 그렇고, 이병우나 대미언 라이스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그렇게 수줍다는 점에서 비슷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다. 대미언 라이스는 공연장에선 안 봐서 어떤지 잘은 모르겠지만, 음악을 그만 두고 싶어진 계기에 관해 이야기했던 인터뷰를 봐서는 비슷할 것 같고. 이병우는,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갔던 공연에서였던 것 같은데, 자긴 사실 콘서트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가급적 콘서트 자주 안 하려고 한다고 뭐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고 하기엔, 그 사람 글을 전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당당히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모리스 블랑쇼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도, 초기에 저널리스트로 일을 했던 몇 년 간을 제외하곤 평생 자신의 저술활동 이외의 그 어떤 외부의 공식활동을 하지 않았고, 인터뷰나 사진촬영 따위도 하지 않을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은둔한 채 오롯이 자신의 책과 글을 통해서만 세상에 말을 건넨 사람. 그냥 음악이란 거 혹은 글이란 거, 자기 안에서 터져나오려는 들끓는 웅성거림이 있어서, 그래서 자긴 그저 그 터져나오는 소리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느라 글쓰거나 연주하거나 노래할 뿐인데, 그로 인해 사람들 많은 데서 뭔가를 해야만 하는 버거움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동으로' 따라오고, 심지어 그 때문에 음악과 글을 쓰는 것 외의 많은 것에까지 얽혀야 하는 그 시끄러움. 얼마나 싫을까.
그래서 그런가. 난 왠지 그런 사람들의 숫기없음이나 수줍음을 존중해주고 싶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음악으로'만' 그 사람을 만나고, 뭐 혹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라면(^^) 스케이트를 통해서 그(녀)를 만나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장 쓰고 싶은 글로만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뭐 자기도 다 벌어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세상밖에 나온 거니까, 어차피 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 사람이 자신과 실제로 '일상'을 공유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그토록 많은 일상의 내밀함과 삶의 순간들까지 전부 나누겠다고 동의한 적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일거수일투족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쑤셔보고 쿡쿡 찔러볼 권리 따위 허락한 적은 더더욱 없거니와.
간혹 누군가를 집어 '공인으로서의 책임' 운운하는 말 미디어에서 쓰는 거 볼 때, 내가 다 불쾌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인정을 해주고 나서,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거론하는 건가. 법적인 권리의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있는 건가. 캐나다에 있으면 길거리를 그냥 걸어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 김연아 인터뷰 보면서 무척 안타까운 기분 들었었는데.
어떤 사람들 보면, 그 사람이 그저 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목소리나 손짓, 몸짓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나눠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유 하나도 필요 없이, 너무 고맙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끄러움에 생채기가 너무 많이 나서 다시 자신의 달팽이집 속으로 돌돌 말아 들어가버려 그의 음악이나 공연이나 책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스러운데. 그런 건 조금도 헤아리지들 않는 사람들 보면 가끔은 내가 더 답답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