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왠지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써놔야 할 것 같은 조급함마저 들어서 얼른 아이스쇼 후기를 쓴다.

공연장이었던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들어갔을 때의 첫번째 인상은, 자리가 정말이지 깜짝 놀랄 만큼 좋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진짜 이렇게까지 가까울 줄이야. 정식 링크가 아니라 체조경기장이었기 때문에, 경기장 바닥 높이부터 바로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고, 우리는 정면에서 왼쪽으로 살짝 빗겨있는 쪽, 앞에서 6번째 줄이었다. 표를 선물해준 키드니에게 다시 한번 고맙고도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공연 순서는 일단 단체 공연 뒤에 바로 선수들 소개를 죽 한 번 하고, 그 다음에 단독 무대를 1팀씩 마치고 나니 1시간쯤 경과했다. 링크의 얼음상태를 정리하는 20분의 인터미션 뒤에 남자 선수 단체, 여자 선수 단체,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유망주 페어 팀이 일종의 오프닝 공연 식으로 공연을 하고, 다시 선수들 솔로를 마치고 단체 공연과 피날레. 그러고 나니 전체 공연은 2시간 반이 조금 넘었다.


1부 공연에서 브라이언 쥬베르의 캐릭터는 뭐랄까 사랑에 영 서툰 2:8 가르마의 기름발라 머리 넘긴 노총각 컨셉, 뭐 이런 거였는데, 평소 잘 생기고 약간 카리스마 있는 느낌으로 나오다가, 벽돌색 아가일 무늬 니트에, 기지 바지 느낌의 의상 입고 꽃다발 들고 나와서 손으로 머리 자꾸 메만지면서 허둥대는 거 너무 귀여웠다. 음악은 그런 느낌을 살린 가볍고 비트가 빠른 샹송. 그러나 불어를 모르니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그리고 옥사나 돔니나와 막심 샤발린의 어보리진 의상 직접 봤는데, 역시 민망... ㅋ 큰웃음 주려는 것도 좋지만, '아이스댄싱'이라는 장르가 기본적으로 우아함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춤은 너무 애써 관습을 거스르고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난 솔직히 좀 안쓰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춤과 의상이었다. 관습을 거스르는 건 좋지만, 그 결과로 굳이 자신들이 망가질 필요는?

그 외 충격적이었던 건 일리야 쿨릭의 빨간 가죽바지? ㅍㅎㅎ 까만 민소매 상의에 빨간 가죽바지 입고 선글라스 쓰고 나와 후까시 잡는 거 왜 멋있지 않고 자꾸 웃기던지. 하지만 내 옆자리 아주머니는 너무 좋아서 실신이라도 하실 것 같았음. 미아언니랑 난 빨간 바지의 탱탱한 엉덩이가 우리쪽을 향할 때마다 놀라서 움찔움찔했는데- 패트릭 챈은 그냥 가장 고전적인 느낌의 공연을 했다. (상의가 펄 들어간 밤색 소재에다 쉬폰 소개 같은 걸로 앞에 핀턱 주름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얌전했던 편.)

연아가 1부의 마지막 공연을 했는데, 프로그램은 타이스의 명상! 애석하게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입었던 의상 대신 윗쪽은 까만색인데 허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색깔이 옅어져서 하얀색이고, 치마가 두세 겹으로 풍성한 그런 의상이었다. 의상도 '죽음의 무도' 의상이랑 좀 비슷한 느낌이었던 데다가 맨 첫 동작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가 뒤돌아서는 원래 안무 대신, 죽음의 무도 때처럼 양팔을 벌리고 서서 하길래 음악 나오기 전엔 죽음의 무도인 줄 알았다. 타이스의 명상은 곡의 분위기에 맞게 좀더 순수한 느낌의 원래 의상이 난 좋던데, 공연의 성격상 '쇼'에 더 어울리는 화려한 의상을 택한 것도 같다. 전체적인 기획과의 통일성을 생각해서 화장도 더 짙게 한 것 같고. 그리고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때 타이스의 명상 첫번째 점프를 둘 다 1회전 처리해서 그게 실수가 아니라 혹시 원래 안무가 아니냐라는 의문을 네티즌들 사이에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오늘 공연 때는 완벽한 2회전(맞나?) 점프를 보여줌으로써 그런 논란은 결국 논란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시켜준 셈이었다.


2.
2부 첫 무대는 남자 선수들의 단체 공연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기 전 링크 주변에 설치한 불꽃 기구 같은 게 터지더니 까만색 군복에 무장하고 총을 든 -미국의 SWAT 복장 연상하면 될 듯- 사람들이 링크 주변에 등장하고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도 총질하는 군인들이 등장했다. 그때 남자 선수들이 빨간 광선총(?) 같은 거 들고 나와서 이들을 무찌르는 컨셉-_-; 테러리스트들을 무찌르는 정의의 사도 뭐 이런 건지 모르겠으나, 이건 음악에 맞춘 공연도 아니었고, 좀 '지각없고' 문제가 있는 공연이지 않았나 싶다. 그냥 장남감 총싸움을 하는 기분으로 공연을 준비하던 선수들은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지각없는 컨셉 같긴 하지만.)


그 다음 여자 단체 공연은 소녀시대의 'Run Devil Run' 음악에 맞춘 공연. (난 카라라는 걸그룹의 '루팡'인가 하는 곡하고 헷갈렸는데 미아 언니가 정확한 곡 제목을 가르쳐주었다. 가르쳐 주면서 '나 실은 소시빠인 거니?'라며 자책ㅋ) 옅은 자주색이 바탕이 된 데 검은색이 테두리 부분에 들어간 기본 의상을 선수마다 변주된 형태의 디자인으로 입고 나와서 춤추는 여자 선수들 모두 무척 화려해 보였다.
김연아가 대중음악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여자 선수들 단체 공연에도 소녀시대 곡 쓰고, 피날레 직전 단체 공연에도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를 사용했다. 2부 공연은 음악이 전반적으로 매우 대중적인 느낌. 아무래도 조명도 평소 경기와는 다르게 사이키 조명 느낌에다 레이저도 쏘아대다 보니 클럽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오프닝 끝난 뒤 제일 먼저 나온 건 베르너였는데, 체크무늬 배바지에다 등에 구멍난 까만 쟈켓을 입은 외국의 노숙자? 거지? 컨셉에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포즈를 취하며 나와서 (그러다 그 손수건 객석에 던지고 ㅋㅋ)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 ..."라는 곡에 맞춰 코믹하고 유쾌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얼음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듯한 동작도 하고 그래서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로 이어서 나온 패트릭 챈은 무대 한가운데에 임시로 벤취 하나를 갖다 놓고 거기 누워서 공연을 시작. 하얀 남방에 넥타이 메고 약간 남색 양복 같은 걸 입고 (나중에 보니 상의 뒷면은 아가일 무늬가 있는 니트여서 전형적인 양복은 아니었다) "Don't worry, be happy" 음악에 맞춰 춤추는 모습이 마치 꿈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청년 실업자'를 연상시켰다. 면접 떨어지고 나온 젊은이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뭐 이러는 것 같은.  심지어 중간에 팔굽혀펴기 하는 동작도 있어는데, '이럴 때일수록 건강만은 잃어선 안 돼!'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약간 바카스 광고 느낌?

'미녀 스케이터'라는 수식어가 계속 따라다니는 키리 코르피는 몸에 쫙 붙은 데다 재봉선을 따라서는 빤짝이가 잔뜩 박힌 경찰복을 입고 나와서 비욘세 음악에 춤을 추다가 중간에 그 옷을 벗는다. 그러고 나니 역시나 몸에 밀착된 까만색 미니드레스 차림. 미아언니 표현대로 미국의 총각파티에 등장하는 스트립걸 같은 느낌이 나서 약간 민망했다^^;


그 외 2부에선 브라이언 쥬베르 선수가 세계선수권 때 보여줬던 갈라쇼 무대 공연을 했는데, 옆구리쪽은 망사 처리가 돼 있고 몸통 부분엔 펄이 들어간 파란색 쫄쫄이 의상을 입어 참으로 민방하더이다- 음악은 뭔가 테크노 느낌이라 TV로 봤을 땐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선곡이었는데, 막상 '쇼'장에서 보니까 나름 분위기를 띄우는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옥사나-막심 페어 역시 세계선수권 갈라 프로그램이었던 매트릭스 의상을 입고 공연을 했는데, 도중에 얼음 위에 누워 있는 막심 선수에게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해주는) '비행기 태우기' 동작 비슷하게 옥사나 선수가 위쪽에 엎어진 자세로 있다가 몸을 완전히 뒤집어서 막심 선수 머리 위에 서는 동작이 있는데 그 착지동작할 때 옥사나 선수의 스케이트 날이 막심 선수 머리에서 채 10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 떨어지는 듯 해서 정말 아슬아슬해 보였다. 엄청난 연습에다 상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다면 절대 할 수 없을 동작이었을 것 같아 선수들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2부 솔로무대 역시 마지막은 김연아가 장식했는데, 김연아의 007메들리 본드걸이 등장하기 전에, 공연장 무대 위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미국의 만화 그림으로 본드 걸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오고, 그 다음에 무대가 움직이면서 정작 먼저 등장한 것은 제임스 본드 차림으로 양복을 쫙 빼입은 브라이언 오서! 거의 김연아에 버금가는 환호를 받으며 등장해서 그의 장기인 백플립(? 뒤로 공중제비?)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연아가 등장해 제임스본드 메들리에 맞춰 본드걸 공연 ㅠ.ㅠ 개인적으로 지난 시즌 쇼트인 '죽음의 무도'나 이번 시즌 프리인 '거쉰의 피아노 협주곡'을 보지 못해 애석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2시간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많은 공연을 하면서 프리프로그램을 한다는 건 무리였을 듯. 본드걸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공연장 분위기나 조명 탓인지 몰라도, 같은 프로그램이지만 '쇼'는 역시 '쇼'인지라 경기를 볼 때의 긴장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서 피가 솟구치는 느낌의 스릴 같은 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대신 좀더 편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그냥 공연을 '즐겼다.'

그리고 김연아의 솔로공연을 마지막으로 한 뒤 모든 선수들이 등장해 브아걸의 시건방춤 추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외국 선수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아는 다른 선수들 춤추는 사이 들어가서 반짝이 상의에 금색 줄이 양쪽에 들어간 까만색 가죽바지로 갈아입고 나온 뒤 단독으로 나와서 시건방춤 한 번 춰 주시고 ㅋㅋ 이 소녀는 정말이지 손끝 하나 움직이는 느낌도 어찌나 좋던지.


3.
다들 엄청 연습하고 힘들었을 텐데, 힘이 하나도 안 들게 느껴지도록 공연하는 게 정말 놀라웠고, 단체 공연과 각 팀들의 공연 2가지씩을 보고 나니 2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후딱 가버렸다. 

다만 우리 자리의 유일한 맹점은 자리 자체와는 무관한, 우리 주변의 관객들이었다. 한 줄에 다섯 좌석씩 배치한 뒤 사이사이에 통로가 있었는데, 미아언니와 나는 오른쪽에 두 명, 왼쪽에 한 명 사이에 끼어앉았다. 일단 나의 바로 왼쪽에 앉았던 이 50대쯤 돼보이던 아주머니. 연아와 피겨스케이트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외로운 광팬인 듯했다. 선수들 나올 때마다 소리 꺅꺅 지르며 열광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선수들 소개 듣고 나면 뒷말 당신이 직접 다 이으시고- (이를테면, 캐나다의 패트릭 챈 선수가 링크에 나오기 전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여 소개를 하면, 그 소개의 말을 듣고 나서 혼자 '패트릭 챈~!' 이렇게 중계를 하셨달까-_-;) 뿐만 아니라 뭔가 선수들이 공연 도중 재밌는 제스쳐를 취했다 싶으면 연신 혼자 "꺄꺄꺄꺄" 소리를 내며 희한하게 웃으시는 거. 헉- 게다가 팬으로서의 애정이란 거 이해해야겠지만, 아무도 안 일어서는데 혼자 일어서서 기립박수 쳐주시고. 아름답다기보다... 늙어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키드니가 예전에 썼던 ㅌㄹ마을 20년 후인지, 30년 후인지 뭐 그런 스토리처럼.)

그리고 우리 앞의 서너 줄 정도는 도대체 어떤 경위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선생님 한두 명이 인솔을 해서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돼 보이는 애들을 스무 명쯤 데리고 왔는데, 애들이 처음 두 공연 정도만 보는 듯하다가 점점 지루해 하더니, 마침내 인터미션이 끝난 뒤 2부에는 심지어 계속 들락날락하거나 의자 갖고 장난치거나 해서 엄청 산만. 미아 언니와 나는 '저 아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저렇게 아까운 좌석을 ㅌㄹ마을 주민들이 와서 채워줬더라면 얼마나 알차게 즐겼을까' 하며 무척 아쉬워했다.

마지막으로 진행상 아쉬웠던 점은, 각 선수들을 소개하던 장내 아나운서의 톤이 마치 프로레슬링이나 복싱 경기 선수 소개하는 듯한 말투였다는 점. 무척 거슬렸다. ('퍼포먼스' 이런 단어도 '퍼포- (쉬고) 먼스' 이런 식으로 끊어 읽는 등 말투로 여러 가지 코미디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정식 링크가 아니어서 그런지 링크가 평소보다 작은 듯했다. 그래서 점프를 위한 거리와 속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던 탓인지 점프 실수가 잦은 편이었다. 철푸덕 넘어진 경우는 패트릭 챈의 2부 공연 한 번뿐이긴 했지만 나머지들도 착지가 불안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선수들의 공연은 하나같이 너무 귀엽고 유쾌했다. 마지막 피날레 때 오서 코치는 뒤로 재주넘기 한 번 더 보여주시고, 안무가 데이빗 윌슨도 모습을 보이고. (동글동글 무척 귀여움^^) 키드니의 고마운 선물이 아니었다면 결코 해볼 수 없었을 정말 너무 황감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만약 김연아가 은퇴를 하지 않아서 경기를 볼 기회가 있다면, 더더욱 경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공연이었다. 경기의 그 스릴과 긴장감 꼭 느껴보고 싶어지더라는- (우리 아버지 표현에 따르자면 '말 타면 종마 잡히고 싶어하는 법'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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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