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사라진 서울

review/book 2010. 5. 7. 15:13

사람이란 제가 익숙한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지금 부산에 살고 있지만, 부산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정작 이 공간에 대한 관심은, 이곳을 떠났다가 한참 뒤 우연이거나 필연이거나 다시 찾아와, 모든 것이 변한 것을 보고서 아, 예전에 저기 그런 것이 있었지 하는 탄식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1910년 이후 신문과 잡지가 서울에 대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울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기점으로, 일본인의 손에 의해 없던 길이 뚫리고 수백 년 묵은 궁궐과 관청과 성벽이 헐려나가고, 동리의 이름이 바뀌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주거지의 성격이 달라졌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서울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마냥 익숙했던 것이, 문득 생생한 관심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1910년 이후 신문과 잡지에 서울 관계 특집이 종종 실렸던 이유다.

전공은 한문학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풍속사나 문화사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는 강명관 선생님의 2010년 신간 --이미 1월에 나왔는데 서점에 갔다가 얼마 전에야 우연히 발견하긴 했다.-- 『사라진 서울: 20세기 초 서울 사람들의 서울 회상기』라는 책의 서문의 한 단락이다. 이런 깨달음은 항상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발견이다. 사람은 그 순간의 것을 포착하는 대신, 항상 지나간 것, 이미 사라진 것만을 다시 떠올리고 생각하고 기록한다. 그것은 단지 기억의 작용만은 아니다. 실은 인간의 인식 행위라는 것 자체도 본질적으로 그렇다. 인식은 그것이 비록 0.000000000001초의 차이라 해도, 실제적인 행위가 일어난 '이후'에야 일어나는 것이다. 행위와 '동시에' 인식이 수반되는 경우는 없다. 우리의 인식은 항상 행위의 잔영에 관한 것인 셈이다. 인간의 인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러하니, 인간의 삶의 모든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직, 이미 사라진 것에 관한 기억을 그러모아 삶의 그 다음 순간을 채워가는 듯한 우리의 삶을 문득 떠올리게 한, 바로 저 서문의 한 단락 때문에 강명관 선생님의 이 책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곤 해도 내용 자체도 어마어마하다. 454페이지의 분량에 달하는 이 책은, 1910년부터 45년 사이에 신문과 잡지에 실렸던, '조선 시대에 서울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을 담은 글들을 옮기고 편집해서 엮은 것이다. 이미 통일되고 정리된 한 가지 자료를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자료들 중에서 내용에 부합하는 것들을 골라내고 그걸 다시 현대 한국어로 옮기고 편집하는 작업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게다가 그 안에는 서울의 궁궐과 사대문 등 굵직굵직한 곳의 지명과 관련된 유래와 변천사뿐만 아니라, 사직동의 사직단, 현저동의 형무소, 필운동의 돌거북, 정동의 서양인촌, 봉래정의 빈민굴 등 서울의 구석구석과 얽힌 온갖 역사와 뒷얘기들, 게다가 새로운 풍속이나 명칭들의 옛 모습들까지 풍성하게 엮어내고 있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은 대체 뭔 관계야? 서울의 문은 대체 이름들이 왜 그런 거야? 뭐 이런 궁금증이 한번쯤 있었다면 --없었으면 할 수 없구...-- 그 질문들에 대한 풍성한 대답들을 찾아낼 수 있다.

사실 내용은 백과사전적 지식에 가까운 것이어서, 단숨에 다 읽히지는 않았지만 --지식형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발견의 재미가 쏠쏠할 듯. 개인적으로 그런 취향은 아닌지라 난 좀 버거웠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으면서 소설의 서두에 묘사된 파리와 파리 시장의 치밀한 풍경에 압도되어, 자신이 소설을 쓴다면 서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서울의 어디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무엇을 먹고, 어디서 놀았던가 하는 등의 도시의 생생한 내면이 궁금했다고 한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이 되어서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가진 학자의 존재 자체가 멋졌다. 그리고 여기 나온 사실들 몇 가지 외울 수 있으면 잘난 체 하기 진짜 좋을 거 같은데, 난 항상 세부사항에 취약해서, 아마도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듯. ㅋ

마지막으로 ㅌㄹ 마을 주민들도 공감할 재밌는 장소 소개 하나.




  1. 전매국은 좀 더 근래의 명칭은 전매청, 그러니 지금으로 말하면 KT&G 즉, 익숙하게는 '담배인삼공사'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분공장은 한자로 보건대, 전매국 산하의 특정 분과의 공장, 여기서는 담배 공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간성(干城: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3. 장탄생(長歎生)이란 기고자의 이름이 아니라, '길게 탄식하는 서생'이라는 의미로 붙인 필명, 이를테면 아이디에 가까운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