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신용과 신뢰

grey room 2010. 5. 17. 18:35
우리는 지금 신용사회에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꼭 우리가 현재 경제활동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간관계의 전반적인 양상 자체도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인간관계가 '신뢰(faith, belief)'가 아닌 '신용(credit)'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신용은 담보가 될 만한 일정한 자산--유형의 것이든지, 아니면 현재는 무형의 것이라도 어떤 형태로든 유형화할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신용이란 이미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일정한 척도에 의해 가치가 있든가, 현재는 가치가 없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화할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뢰나 믿음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최소한 그 시작은 그렇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하기 이전에 일단 믿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이라는 것도 신뢰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기적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기적을 눈으로 확인한 뒤에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믿음이나 신뢰는 그런 것 이전에 존재한다. 그것은 가시적이거나 가치화된 것 이전에 존재하는, 일종의 직관이나 직감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믿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만큼 믿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미더운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주기 때문에 미더운 사람이 된다.

물론 그런 믿음이 깨질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 다음엔, 관계에 금이 간 그 균열의 지점이 언제나 관계를 재는 척도가 된다. 그 불신이 시작된 순간과 닮은 어떤 말이나 행동이 다시 나오면, 그것이 실제로 기존의 그 말이나 행동과 완전히 '동일'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잖아.'라는 말로 그 사람을 다그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한번 깨진 믿음은 회복되기 어렵다. 아니, 최소한 아무런 조건없이 다시 믿지 않는 한, 그 믿음은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미더운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출발의 지점에서 믿음이란 그의 미더움과 무관하게 존재했다. 자신이 믿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미덥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된 이상 그 관계는 믿음에 기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신용을 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신용이 바닥나기 전까진 관계가 유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담보 잡힐 것도 없고, 그래서 신용파산을 하는 순간, 관계는 결국 끝이 난다. 헌데 사실 생각해보면 믿음의 조건이란 간단하다. '진실'하면 되는 것이다. 신용를 쌓는 방식이 일정한 기대치, 일정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뢰는 솔직함, 진실함에서 나온다. 그것이 아무리 세상이 기대하는 삶의 태도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모르겠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것, 그런 건 역시 지나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속았다는 의미인 것일까.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었다는 오만함과 자만심이 상처를 입은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다만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데서 오는 분노를 상대의 기만,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