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우리 엄마는 나를, '참 싫은 것도 많은 애'라고 종종 부르신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에 대해서 한 가지가 좋으면 모든 게 다 좋아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가지가 싫으면 그것의 전체를 싫어하기 일쑤다. 이를테면, 난 가방이나 옷 따위의 특이한 단추나 지퍼 디테일을 좋아하는데, 그런 게 좋으면 그 물건 전체를 좋아하기 마련이고 --예가 너무 통속적인가?-- 사람도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 자질이 있으면 다른 점들까지 모두 덮고 보게 된다. 반면 싫어하는 성격적 자질을 한 가지라도 가진 사람을 보면 일단 싫어하고 시작한다. 물론 그러다가 그 사람을 직접 겪어보면서 그것이 내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테레비 보면서 흰소리 하거나 그럴 때야, 그런 직접적 경험과는 무관하게 비쳐지는 대로 보고 즉자적으로 판단해서 발언하기 때문에 엄마가 나에 대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가 참 싫은 것도 많은 애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될 때는 그런 때다. 나는 젊음의 어떤 무모함이나 그로 인한 변덕이 참 싫다. 세상이 금방이라도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이것이 아니면 죽을 듯이 구는 것이 싫고, 그래놓고 금세 또 다른 것으로 그 열정이 휙 옮겨가버리는 것이 싫다. 정의니 원칙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을 위해 어떤 것들과는 불목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요란을 떠는 비장함도, 또 한편으론 그 열정을 오래 지키지조차 못하는 경박함도 싫다. (이것은 나에게 그런 자질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점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나에게서 그런 점이 발견될 때면 나 자신 역시 싫다.) 그런가 하면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경험에 찌들고 찌들어, 삶에서 지켜야할 그 어떤 원칙도 없는 듯이 느물느물하게 구는 것도 싫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뭘 그래' '니가 세상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야'라며 그 어떤 것과, 말 그대로 '그 어떤 것과' 공존하는 데에도 아무런 거부감도 없는 연체동물 같은 정신도 싫다. 세상의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며 투사라고 자부했던 이들이 돈 몇 푼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싫고, 세상은 돌고도는 것이라며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마주 대하고 대의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도 싫다. 이쯤 되면 참 싫은 것도 많은 애가 될 만하다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그리고 양자를 모두 싫어하는 것이 결국 모순이라는 것을 안다. 호오를 대하는 젊음의 비장함이 싫다면, 호오를 모두 버릴 수 있는 나이든 사람들의 여유를 좋아하든, 그 역이 성립하든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결국 모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도 같다. 젊다고 생각되는 순간엔 젊은이의 그런 자질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나이가 들어간다고 느낄 때면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는 생각에, 내 마음이 움츠러들고 뒷걸음질치는 것이 그런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몸을 던졌을 때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기에 두려운 비겁함. 겁이 많아 구름다리 위로 올라가 봉을 잡고 내려오는 놀이터의 놀이기구에서 끝내 발을 떼고 내려오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대로 몸뚱이만 자란 거 같다. 물론 그만큼 놀이기구도 커지고 높아져 이젠 더더욱 발을 떼고 내려올 수 없게 되었지만.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