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고 말도 하고 싶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 혹은 '사람다운 삶'이라는 표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다. 여전히 '예의'나 '상식'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불쾌감, 불편함, 경멸감, 분노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새록새록 있으니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예전에 읽었던 <장자>가 가끔 생각난다. 잘 이해되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살아야 했나?라는 생각만 들게 했던 그의 말들이 정말 극한의 반문명론적 사유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 '장자'를 그가 '태생적으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적 조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말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인간의 도구인 말이나 글을 사용하여 표현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삶에 대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하는 발언들에 대해서는 요즘 종종 불편함을 느낀다. 장자야말로 정말 선구적인 반문명론자, 그러므로 반인문학자가 아니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고민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무관했다. 최소한 인간들의 규칙과는 무관했다. 그가 인간으로서 가장 노력한 것은 인간들의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규칙을 몸에 익히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그 '구체적' 계기야 어떤 것이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식과 배신, 자기정당화의 과정을 겪어 극단적 환멸에 다다르는 것이야 어디 장자만이 경험한 '극적인 사건'이었을까.
장자에 관해서는 노자의 장례에 문상을 갔다가 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노자조차도 '자연은 불인하다'라는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떤 '인간적 삶'을 은연중에 설파했을 거라는 증거로 받아들여 그에게 실망을 표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 수중에 책이 없어서 사건정황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 그의 지인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장자의 반응에서 장자의 극단성을 말하기도 하는데, 나 역시 하나의 극단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1
하지만 그것은 그가 그만큼 일말의 위선, 일말의 표리부동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그가 '인간적 삶'에 대해 보이는 격렬한 거부감은, 그저 원래 인간의 삶은 이러저러한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인간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정도의 문제제기가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의 모든 존재들의 삶이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일부인 '인간'도 그런 '대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본 것이지, 인간에게만 인간이 따라야 하는 별도의 예외규칙 같은 걸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 같다. 그것을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장자를 너무 다른 '인문학자'들과 뭉뚱그려 버리는 발언 같아서 최근에 난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의 글--특히 '인간세' 장 같은 부분--을 읽다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규칙들이 세상 전체에 퍼져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물처럼 느껴지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태어나는 순간 자신들의 물리적이거나 유전적인 삶의 조건 속에 태어나듯, 그렇게 태어나는 순간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 같다. 그렇지만 그런 삶을 계속 인간의 규칙 안으로 다시 끌어넣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연의 삶을 배울 것인가, 혹은 인간의 삶보다 더 큰 삶의 원칙과 어떻게 다시 접속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서 그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보신주의', 극단의 '이기주의' 같아 보이는, 수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실은 인간을 위한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으며 자연의 원리에 가장 충실한 삶을 추구한 것이라 생각된다.
@ 당장 수중엔 책이 없는 상태로, 예전에 읽었던 기억에 바탕을 해서 갑작스럽게 쓰다 보니 내용 확인도 안 되고 인용도 제대로 하질 못하고 그냥 끄적였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예전에 읽었던 <장자>가 가끔 생각난다. 잘 이해되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살아야 했나?라는 생각만 들게 했던 그의 말들이 정말 극한의 반문명론적 사유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 '장자'를 그가 '태생적으로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적 조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말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인간의 도구인 말이나 글을 사용하여 표현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삶에 대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하는 발언들에 대해서는 요즘 종종 불편함을 느낀다. 장자야말로 정말 선구적인 반문명론자, 그러므로 반인문학자가 아니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고민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무관했다. 최소한 인간들의 규칙과는 무관했다. 그가 인간으로서 가장 노력한 것은 인간들의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규칙을 몸에 익히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그 '구체적' 계기야 어떤 것이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가식과 배신, 자기정당화의 과정을 겪어 극단적 환멸에 다다르는 것이야 어디 장자만이 경험한 '극적인 사건'이었을까.
장자에 관해서는 노자의 장례에 문상을 갔다가 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노자조차도 '자연은 불인하다'라는 가르침을 전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떤 '인간적 삶'을 은연중에 설파했을 거라는 증거로 받아들여 그에게 실망을 표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 수중에 책이 없어서 사건정황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다. 그의 지인이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장자의 반응에서 장자의 극단성을 말하기도 하는데, 나 역시 하나의 극단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1
하지만 그것은 그가 그만큼 일말의 위선, 일말의 표리부동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그가 '인간적 삶'에 대해 보이는 격렬한 거부감은, 그저 원래 인간의 삶은 이러저러한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인간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정도의 문제제기가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의 모든 존재들의 삶이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일부인 '인간'도 그런 '대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본 것이지, 인간에게만 인간이 따라야 하는 별도의 예외규칙 같은 걸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 같다. 그것을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장자를 너무 다른 '인문학자'들과 뭉뚱그려 버리는 발언 같아서 최근에 난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의 글--특히 '인간세' 장 같은 부분--을 읽다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규칙들이 세상 전체에 퍼져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물처럼 느껴지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태어나는 순간 자신들의 물리적이거나 유전적인 삶의 조건 속에 태어나듯, 그렇게 태어나는 순간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 같다. 그렇지만 그런 삶을 계속 인간의 규칙 안으로 다시 끌어넣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연의 삶을 배울 것인가, 혹은 인간의 삶보다 더 큰 삶의 원칙과 어떻게 다시 접속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서 그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보신주의', 극단의 '이기주의' 같아 보이는, 수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실은 인간을 위한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으며 자연의 원리에 가장 충실한 삶을 추구한 것이라 생각된다.
@ 당장 수중엔 책이 없는 상태로, 예전에 읽었던 기억에 바탕을 해서 갑작스럽게 쓰다 보니 내용 확인도 안 되고 인용도 제대로 하질 못하고 그냥 끄적였다.
- 단순히 잔인하다든가 잔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仁)'이라든가, 선악 구분과 같은 인간적 관념이 없다,는 의미의 명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