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을 발휘하여 한 고비를 넘기고 났더니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의외로 재미있는 책이었다. 캐릭터들이 등장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서사가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긴 힘들고,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잠언집이나 픽션의 형식을 띈 아마추어 문화비평 같은 걸로 생각할 수 있을 듯. 문화비평이라고 한 이유는, 이 소설 속 화자가 플로베르의 삶이나 소설과 관련된 '문학계'의 이른 바 전문적 접근에 대해 던지는 날카로운 코멘트에서 문화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흥미로운 발언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 문학자들이 문학을 대하는 과도하게 경직되고 진지한 태도에 대해, 줄리언 반스가 작가로서 느꼈을 것 같은 불편함이나 우스꽝스러움을, 퇴역 의사이자 플로베르 애호가인 화자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밖에서 책을 읽다가 키드니에게 빌린 책이기 때문에 줄을 치진 못하고, 가방 귀퉁이에 구겨져 있던 어떤 카드사 광고 전단을 마구잡이로 찢어서 이 페이지 저 페이지에 꽂아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ㅋ (하루는 지하철에서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을 옆자리 아주머니가 '쟤 지금 뭐하냐?'는 의문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기도.) 그렇게 꽂혔던, 혹은 꽂았던(^^) 구절과 단락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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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을 일부 작가들은 '도안식'의 완벽함을 취한 것에 반해 플로베르는 주제에 의해 마치 저절로 끌어내진 듯한 완벽함을 추구했으며,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수퍼마켓에 가서 철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랍의 평원이나, 어두움, 눈 속, 빗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개를 흉내 내어 짖는 따위의 희귀한 방법으로, 찾고자 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표현한 것에 감탄했다. 나처럼 어떤 것의 언저리에 있는 것을 택해 그 순간의 감정이나 상황을 대충, 두루뭉수리하게 설명하는 엄밀하지 못한 필자와는 달리, 이런 사람들은 이 순간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예리하게 감각을 연마했을까,라는 느낌은 언제나 놀랍다. 역시 글이란 이런 사람, 혹은 이렇게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 써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1.
나는 『보바리 부인』을 여러 번 읽었지만 여주인공의 눈빛이 무지개처럼 변한다는 사실은 한 번도 깨닫지 못했음을 자백해야겠다. 내가 그것을 꼭 깨달아야 하는가? 당신은 어땠는가? 나는 스타키 박사가 놏히고 지나간 것을 주목하느라 너무 바빴나 보다(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당장 생각나지는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 완전한 독자. 절대적인 독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스타키 박사의 『보바리 부인』 독서는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갖게 되는 모든 반응을 다 포함하고, 나아가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나의 독서 따위는 어느 면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독서는 문학 비평사의 관점에서 보면 초점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즐거움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가 없지도 않다. 평범한 독자가 전문 비평가보다 책을 더욱 즐겁게 읽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잊을 수 있다. 스타키 박사와 같은 사람들은 기억력의 저주를 받고 있다. 그들이 가르치고, 평을 쓰기도 하는 그 작품들은 그들의 두뇌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가족이 된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어떤 비평가들은 그들의 비평 대상에 대해 희미하지만 후견인 같은 태도를 취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마치 플로베르나 밀턴 또는 워즈워드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따분한 늙은 아주머니 --김빠진 분 냄새를 풍기며 과거에만 관심이 있고, 수년 동안 새로운 것이라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과거는 지나간 작가의 안식처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작가는 누구나 세 없이 무료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히, 글쎄 알겠지만...... <시간문제> 아닌가?
평범하나 열정적인 독자는 잊고 싶은 작가는 잊을 수 있다. 언제라도 어떤 작가를 떠나 다른 작가들을 좋아하다가 다시 돌아와 심취할 수도 있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가족적 관계가 끼어들 필요는 결코 없다. 드문드문 관계를 갖지만 관계를 가질 때는 항상 열렬하다.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소처럼 함께 살 때 생기는 일상적인 증오 따위는 전혀 없다. 나는 짜증난 목소리로 플로베르에게 욕실 매트를 걸어 말리는 것을 잊지 말라든지, 솔로 변기를 세척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은 결코 없다. 그 런데 스타키 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 같다. 남편이나 아내도 완전하지 못하듯이, 작가들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93-5)
많은 비평가들은 과거를 규정하고, 무언의 권위로 예술의 미래를 설정하는 문학의 독재자가 되기를 좋아한다. 이번 달은 모두 이것에 관한 것만 써야 한다. 다음 달에는 아무도 그것에 관하여 쓰면 안 된다. 우리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어떠어떠한 책은 다시 인쇄해서는 안 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이런 나쁜 소설은 모두 즉시 없애 버려야 한다.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ㄴ가? 1983년 3월, 「리베라시옹」지에서 프랑스 여성 인권부 장관은 <성차별을 부추기는 유해 도서 목록>에 다음의 작품들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팡타그뤼엘』, 『비운의 주드』, 보들레르의 시들, 카프카의 전 작품, 『킬리만자로의 눈』, 그리고 『보바리 부인』. (122)이 두 개의 단락은 일종의 문학권력이 되는 전문가들에 대한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비판으로 읽혔다. 문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미 가느다랄대로 가느다란 실낱을 다시 낱낱이 쪼개고 또 쪼개는 듯한 병적인 전문성을 발휘할 때,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잘 떠나지 않는 걸 보면, 난 천상 아마추어밖엔 안 되는 것인가 싶을 때가 많은데, 어쨌든 그런 아마추어 정신의 힘과 전문가들의 허세를 재미있게 꼬집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연구자들이 온갖 연표와 문구와 인간관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펼쳐놓을 때 헉 소리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그 엄청난 압박에 숨이 막힐 것 같던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줄리언 반스가 그것을 기억력의 저주를 받았다느니, 작가에 대한 후견인의 태도를 취한다느니, 그리고 짜증난 목소리로 욕실 매트를 걸어 말리는 것을 잊지 말라든지, 솔로 변기를 세척하라고 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에 허를 찔린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2.
오늘날 우리는 미쳤다mad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정신과 의사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늘 이야기한다. 짧고, 단순하며, 진실한 단어들을 사용하라. 죽었다, 죽어 가고 있다, 미쳤다, 간통이란 말을 나는 사용한다. 돌아가셨다, 떠나갔다, 종착역에 도착했다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오! 그는 종착역에 도착했다고? 어느 역에? 유스톤, 세인트팬크라스, 게어 세인트라자르?). 미쳤다는 표현 대신에 개성 혼란, 빈둥빈둥 헤매다, 옆구리를 물렸다, 그녀는 언니 찾아 집을 나간 적이 많다라는 말을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미쳤다와 간통이란 말을 쓴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방식이다. 미쳤다라는 단어는 음향 효과도 좋다. 그것은 평범한 단어이며 정신 이상이라는 것이 우편 마차처럼 찾아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단어이다. 끔직한 것들은 역시 평범한 것이다. 나보코프가 『보바리 부인』에 관한 그의 강연에서 간통에 관하여 무어라 말했는지 아는가? 그는 간통이란 인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인습적인 방법이다>라고 했다. (113-4)완곡어법이나 은유법에서 언어유희의 재미를 발견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언어유희의 향연에서 겹겹의 가식만을 발견할 때가 있고, 가장 진실하다는 느낌은 확실히 가장 단순하고 꾸밈없이 말할 때 받기 마련이다. '죽었다'는 표현 대신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표현을 쓰는 데 대해 '종착역에 도착했다고? 어느 역에?'라고 묻는 작가의 짓궂음이 재미있다.
3.
『뉴 스테이츠먼』과 같은 잡지에 난 개인 광고들을 알고 있지요? (중략) 나는 잡지의 뒷쪽에 실린 이런 광고들을 항상 읽는다. 하지만 한 번도 편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막 그 이유를 깨달았다. 광고 내용을 하나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를 한 사람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는 아주 진지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 광고란은 광고자들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광고의 양식이 권장하는 대로, 심지어는 요구하는 대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누구도 자신을 우울에 빠지기 쉬운 활동적인 비흡연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 거울을 마주하는 것으로 당신은 직접 자신에 대해 정의할 수가 없다. 다음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플로베르의 말이 옳다는 것이다. 문체는 주제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무리 애를 스더라도 광고를 내는 사람은 광고라는 그 형식에 항상 두들겨 맞기 마련이다. 그가 솔직히 자신의 개성을 광고에 표현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그는 광고의 형식에 얽매여 바라지도 않는 비개성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118)내용의 진실성과는 무관하게 또 형식에 의해 왜곡되는 진실이라는 것의 문제. 흥미롭다. 뭐랄까, 앞에서 언급했던 어휘 선택의 문제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도 같고. 아무리 진실을 말하더라도 살갗에 닿는 듯한 직설적인 표현이 아닌 것을 통해 말할 때 의미가 뒤틀리듯, 광고라는 외피에선 진실조차도 진실로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이는 우리에게도 말한다는 것, 글쓴다는 것, 그리고 표현한다는 것에 대해 다른 지평의 질문을 던진다. (혹은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를 그저 '다시' 던지는 것일 수도 있고.)
4.
이미 존재하고 있는 소설들에 관한 소설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현대적 번안>, 재구성, 후편 또는 속편을 금지한다. 저자가 미완성으로 남기고 죽은 작품들을 상상력을 발휘해 완성하는 것은 금지한다. 그 대신 모든 작가에게 고운 털실로 수놓은 표어를 지급해서 난로 위에 걸어 놓도록 해야 한다. 표어는 <너 자신의 실로 짜라>이다. (124)표어에서 빵 터졌음. ㅋㄷㅋㄷ 확실히 대가가 남긴 미완의 작품을 후대의 작가들이 결말을 완성하거나 속편을 쓴 것에 대해선 항상 실망만 하고, 원작의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궁금증만 되풀이해서 남겼던 것 같다. 그런 후세 작가들을 무슨 실 도둑 취급하는 거, 아무리 봐도 웃기다.
5.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사람들은 나이 든 당신의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면, 그들은 단지 생일, 결혼식, 성탄절 같은 의례적인 경우에만 당신의 사진을 찍는다. 얼굴이 붉고 쾌활한 표정의 인물이 친구와 가족에 둘러싸여 술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러한 증거는 얼마나 진실하고 믿을 만한 것인가? 나의 결혼 25주년 기념사진들은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분명히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진을 안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29)안 그대로 오늘 아침에 페이스북에 친구가 올린 두살배기 친구 딸아이 사진을 보다가, 방에 있던 앨범을 꺼내서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았다. 친구 딸아이도 그랬지만, 학교 들어가기 전 가족과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 속의 나의 표정은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물론 카메라 앞이라고 나름대로 표정을 잡아 웃는 사진도 있었지만, 정말 아무런 연출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찍힌 사진이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연출된 상황인 데도 눈이 카메라를 향해 있지 않거나, 언짢은 기분 혹은 멍한 상태인 표정이 고스란히 다 찍혔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어린 시절밖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설이라면 일단 서사성이 충실한 정교한 작품을 좋아하지만, 때론 그저 서사의 맥락은 없더라도 불쑥 날아드는 비수 같은 이런 날카로운 코멘트들 역시 재미있다.
6.
저자가 작품 속에 부재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주장은 아주 철저하다. 몇몇의 작가들은 외관상 이 원리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들은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대단히 개인적인 문체로 독자를 곤봉으로 두들겨 패듯 때려눕힌다. 이러한 살인은 완벽하게 수행되나 범죄 현장에 남은 아구방망이에는 지문이 강하게 남아 있다. 플로베르는 달랐다. 그는 문체를 믿었다. 어느 누구보다 그랬다. 그는 아름다움과 음향가 정확함, 그리고 완벽함을 달성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와일드와 같은 작가들이 취한 도안식(圖案式) 완벽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문체는 주제가 끌고 온다. 문체가 주제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서 발생한다. 문체는 사고의 정확한 반영이다. 정확한 단어, 분명한 어구, 완전한 문장은 항상 <저쪽> 어딘가에 있다. 작가의 임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찾는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수퍼마켓에 가서 철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랍의 평원이나, 어두움, 눈 속, 빗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개를 흉내 내어 짖는 따위의 희귀한 방법으로, 찾고자 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 (108-9)이 부분이 가장 와 닿으면서도 가장 재미있었다. 이건 최근 팻 메스니의 공연을 보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자기 분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나 장인들이 그 순간, 그 자리에 딱 들어맞는 한 가지 단어나 소리, 색을 택하기 위해 자신들의 언어--말그대로 언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분야에 있다면 소리나 색채일 수도 있는--에 대해 취하는 엄정한 태도에 대해, 줄리언 반스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달까. 그것은 한 문장 안에서는 이 단어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단락이나 장, 그리고 전체의 흐름과 리듬 속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가 되어야 하기도 해야 하는 그런 문제인지라, 절대적 하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주 무책임한지 몰라도, '이게 딱인 것 같은데' 혹은 '이건 좀 아닌데'라고 느낄 수 있는 '감(感)'의 문제이고, 그것을 연마하는 것이 곧 그 소통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모두 엄밀하게 알아서 문장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씩 덧붙여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뭐가 왜 틀렸는지 딱 집어내지 못해도 '지금 그 문장의 조사 사용이 좀 어색한데'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감각의 문제인 것처럼.
바로 그것을 일부 작가들은 '도안식'의 완벽함을 취한 것에 반해 플로베르는 주제에 의해 마치 저절로 끌어내진 듯한 완벽함을 추구했으며,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수퍼마켓에 가서 철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랍의 평원이나, 어두움, 눈 속, 빗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개를 흉내 내어 짖는 따위의 희귀한 방법으로, 찾고자 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표현한 것에 감탄했다. 나처럼 어떤 것의 언저리에 있는 것을 택해 그 순간의 감정이나 상황을 대충, 두루뭉수리하게 설명하는 엄밀하지 못한 필자와는 달리, 이런 사람들은 이 순간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예리하게 감각을 연마했을까,라는 느낌은 언제나 놀랍다. 역시 글이란 이런 사람, 혹은 이렇게 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 써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