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침묵에 귀기울임

grey room 2010. 6. 12. 22:42
아무 말 하지 않을 때조차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 사람이란 동물이지만, 대부분은 모두가 일시에 떠들어 대면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음성엔 귀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이 가장 일상적인 형국이 아닌가 한다. 어릴 때와 같은 활자중독증은 내게선 없어진 지 오래지만, 어쨌든 앞다투어 튀어나오는 말들,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활자들이 전쟁을 벌이는 곳이 내가 속한 세계라는 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 속에서 --최근 들어선 더더욱-- 빈번히 그런 의문에 부딪친다. 지금 접한 이 이야기는 또 어떤 승자의 서사일까 하는. 결국 목소리 큰 사람만이 떠들어대는 세상, 혹은 들려오는 것, 들려진 것이란 항상 승자들의 목소리뿐인 세상에서 우리는 정작 들려오는 것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침묵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소음을 잠재우고 고요와 침묵, 들리지 않는 약자들이 소리에 귀기울이는 '드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영화 <싱글맨>을 보다 보면, 대략 이렇게 집약될 수 있는 대사가 나오는데 --대사가 나온 맥락은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지만-- 그 대사가 순간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서, 원작이라는 소설이 문득 읽어보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어제 봤던 <싱글맨> 때문일 수도 있고, 오늘 메신저로 간만에 나누었던 어떤 친구와의 대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저런 일상적인 안부의 말을 나누고 헤어졌을 뿐이지만, 나를 잊지 않고 이렇게 한두 마디 건네주는 게 고마운 이런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뜬금없이 왜?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들도 간혹 있다. 나는 친구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과의 침묵이 나에게 견딜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이때 침묵이란 그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의 고요를 말하기도 하고, 서로 간에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채 지내온 공백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 침묵의 시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그 사이를 온갖 추측으로 메우지 않고 정말 액면 그대로 '오랜만이야'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놓을 만큼 침묵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 전자의 경우 내가 꼭 그 사람의 생각을 다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가 굳이 그 사람의 생각을 다 알지 않아도, 그 사람이 '딴 마음'이나 '딴 생각' 같은 거 품고 있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어서 굳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어낼 수 있지 않아도, 침묵을 그냥 침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후자의 경우가 오히려 자꾸 그 생각을 읽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경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어딘가에 가서 나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다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 사람과는 얼굴을 마주 대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정말 불편하다.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것도 억측에 불과한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어쨌든 대단히 불편한 관계인 셈이다.


침묵을 그저 침묵인 채로, 온갖 말들로 꾹꾹 눌러담아 곡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그런 드문 순간, 비록 찰나일지라도, 그런 순간을 만나고 싶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