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그는 인류를 증오했다.

그렇다. 물론, 그렇다. 당신은 항상 그런 말을 한다. 나는 당신에게 두 종류의 대답을 할 것이다. 우선 근본적인 것부터 시작하자.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신들의 어리석고, 감상적인 20세기적인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는가?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는 누이동생을 사랑했다. 그는 조카딸을 사랑했다. 그는 친구들을 사랑했다. 그는 몇몇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그의 애정은 항상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다.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주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그가 인류의 궁둥이를 어루만지는 식으로 ‘인류를 사랑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빗방울을 사랑한다거나 은하수를 사랑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전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은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가? 당신은 쉽게 자기만족에 빠지지는 않는가?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 올바른 쪽에 있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있는가?

둘째로 그가 인류를 싫어했다고 해도 — 나는 그가 인류에게 깊은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 과연 그것이 그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분명히 인류에게 큰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당신에게 인류는 아주 정교한 관개(灌漑) 체계이고, 선교 사업이고, 마이크로 전자 공학일 것이다. 그가 인류를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에 대해 용서하자.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중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 가운데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이른바 사람들이 플로베르에 대해 갖는 통념과 오해들을 부당한 ‘기소’라고 받아들여 그에 대한 반박의 글을 담은 장이었다. 그것은 작가나 지식인으로서 플로베르가 —아마도 때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취한 비판적 입장에 대해, 보통의 독자나 평범한 사람들이 거의 유아적으로 토로하는 불평들에 대해, 줄리언 반스가 ‘어디 한 번 그 얘기 좀 들어보자.’는 식으로 맞받아친 글인데, 정말 구구절절 너무 웃겨서 아주 배꼽을 잡았다. 인용한 대목은 그것 가운데 겨우 한 가지에 불과한데, 나도 종종 고민하게 되는 문제다.

말하자면 ‘인류애’라는 것이나 ‘인간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간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과연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냐, 혹은 그것이 어떤 형태와 어떤 성질의 것이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아주 모호해진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개인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그저 ‘이기적’ 사랑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더 거대한 차원에서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하여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대체 뭔가. 그런 식으로 인류를 대하는 지식인의 글을 읽을 때 우린 오히려 너무 ‘추상적’이라는 느낌밖엔 받지 못한 적 없었던가. 말하자면, 인류의 차원에서 빈부의 문제를 다루는 글을 쓰되 정작 자신의 글과 너무나 괴리된 채 살아가는 어떤 사회학자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들과 일상을 함께 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누가 ‘인류를 사랑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비판의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인류를 가혹하게 비판하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정작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혀버린 사람은 과연 ‘어떤 인류’를 비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과 비판/증오라는 말, 인류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지만, 특정한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인류를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갖는 것과, 뭔가 추상적으로 개념화된 ‘인류’라는 단위만을 생각하고 그들에 대해 애정과 비판을 표출한다는 것 가운데 대체 우리는 누가 인류의 문제를 사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오늘 따라 떠올랐던 건 6.25 기념 다큐에 당시 UN군으로 참전했던 형이 전사하고, ‘형이 죽으면 형이 못다한 일을 해달라’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던 어떤 군인의 이야기가 소개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고, 그런 어리석은 일을 매번 되풀이하는 정부, 그리고 거기에 ‘어리석게’ 놀아나는 대중이나 인류를 항상 비판하지만, 이런 구체적 개인의 문제에 접했을 때 나는 그에게 면전에 대고 ‘당신은 어리석다’라고 말할 자신도 없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 만큼의 의미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헌데 그렇다고 내가 비판하는 인류라는 개념에 그런 개인이 빠져 있는 것도 아닌데, 개개인의 삶의 차원으로 가면 나에게 문제는 항상 미궁에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비록 그가 행한 방식의,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간 ‘인류의 어리석음’을 범하진 않았을지라도, 분명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어떤 방식으로 또다른, 인류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전쟁의 공포와 고문을 견디고 ‘그래도’ 살아남아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하여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60년 후에 다시 한국에 데리고 온 그 참전군인의 삶에는 ‘인류의 어리석음’이라는 추상적 범죄로는 단죄할 수 없는, 삶의 지혜가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플로베르가 옳았다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도 ‘사람들’이라든가 ‘그들’이라는 말을 써서 누군가를 비판하는 추상적인 글을 쓸 때 여전히 내가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 얼굴도 표정도 뭉개진 어떤 추상화 속의 알 수 없는 대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의문 뒤엔, 그렇다고 누군가 한 사람을 집어다 공격하면 문제가 해소되는가,라는 의문도 곧 뒤따른다. 그러니 굳이 말하려는 것이 있다면 —아주 궁색하기 짝이 없지만— 플로베르가 틀려 먹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그 단정적 태도는 틀려 먹었다는 것, 정도밖엔 안 될 터이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