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보통 한 권의 책을 끝내려면 열 시간 이상이 필요한데, 연속해서 그렇게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면 자꾸 소홀해져서 책을 끝까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아마도 전형적인 반동적(reactive) 인간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동분자'라고 말할 때의 반동과 한자는 마찬가지일 텐데, 철학적으로 '반동적'이라고 사람을 말할 때는, 능동에 반한다는 의미다. 자신의 능동적 의지에 의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능동적 힘에 반해서만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누가 어떤 일을 시키면 그 시키는 일을 하기 싫어서 굳이 딴짓을 하는 사람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유형의 사람은 누군가가 시키는 행위가 선행되지 않으면 자신은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때 워낙 책 읽을 시간은 없고, 억지로 해야 하는 다른 것들이 많다 보니, 그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내 의지대로 내가 시간을 조직하고 행위하는 것이 허락된 이후에는 오히려 책을 훨씬 덜 읽는다.
어쨌든, 그런 곡절(?) 속에서도 줄리언 반스의 『내 말 좀 들어봐』는 또 마쳤다^^V 왜들 이 책을 그렇게 재밌다고 했는지 충분히 공감됨.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그랬었는데, 이 작품 역시 '장르'의 형식을 뒤집는 시도로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킨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경우엔 도저히 재미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소설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묘하게 장르를 비틀어 씀으로써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말 좀 들어봐』는 불륜아침드라마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를, 각자의 진실을 말하는 인물들의 독백 혹은 방백을 통해 천박한 가십거리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서사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이 소설 속 사랑의 재미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시쳇말로 하자면-- 찌질한데도,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의 매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통속적 사랑을 다루는 대부분 드라마 속 사랑이나 캐릭터가 재미없는 이유는, 언뜻 찌질하거나 비인간적인 인물 속에 사실은 숨겨져 있던 완벽한 매력이나 인간미 같은 것이 있다,는 것으로 그들의 결함을 벗겨내기 때문인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런 완벽함을 상정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많은 경우 오히려 비루하기까지 한데도 어쨌든 그 안에서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표면상 '동일한 사건'을 경험하는 각자의 감정이 각자의 서술 속에서 중첩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사건의 '동일성'이나 '진실성'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흔들어 놓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분명 각 인물들의 허세나 가식을 만나기도 하지만, 불쾌하기보다는 어쨌든 웃음을 주고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뭐랄까, 불륜(?)을 '상식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여전히 재미가 있다는 것이 작가의 대단한 능력 같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대사에서 시사되는 바도 그렇고, 글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분명 이 작품은 '희곡' 같은 느낌을 주는데, 나는 사실 인터뷰 형식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도 받았다. 각 인물들이 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마치 카메라 뒤에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거나, 혹은 자신이 한 인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인물에게 전해주며 그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인터뷰어 같은 존재가 연상된다. 어떤 것이 됐든, 누군가가 늘어놓는 자기의 이야기,라는 형식만을 취하고도 이렇게 위트있고 흥미를 잃지 않는 서사를 엮을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능력이다.
참고로, 번역자는 이 소설의 원제인 "Talking it over"를 '의논, 설득, 상담' 등의 (일종의) 의역으로 제시했는데, 사실 'Let's talk it over.'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하나하나 되짚어서 죽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자.' 뭐 그런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번역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talking it over'는 각 인물들이 사건을 되짚어가면서 한 번 이야기해 보면서 사실관계도 확인하고 뭐 그러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 뉘앙스를 지닌 우리 말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런 서사에 붙일 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우열을 가리자면 --굳이 누가 가리라고 한 건 아니지만 ㅋ-- 서사의 내용으로서는 『내 말 좀 들어봐』가 분명 재미있고, 이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삼각관계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다룬 재미도 있긴 한데, 뭐랄까,『플로베르의 앵무새』가 도저히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을 소설로 써냈다는 점에서 훨씬 기발한 것 같은 인상이 있다. 그리고 작가가 쓴 작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더 개인적인 소회가 담겨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어서, 작가 줄리언 반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아래는 『내 말 좀 들어봐』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구절들.
인생도 은행일 같았으면 좋겠어. 은행일이 쉽고 간단하다는 말은 아냐. 어떤 일은 굉장히 복잡하지. 그러나 열심히 하면
결국 이해할 수 있어. 아니면 어딘가에 그걸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지. 설사 일이 다 끝난 뒤, 이미 때가 늦은 뒤라도 말이야.
인생을 사는 데 문제는, 이미 때가 늦은 뒤라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는 거야. (56)
이것은 은행에서 일한 스튜어트의 말. 고리타분하고 통속적이라고 올리버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스튜어트지만, 이 말만큼은 구구절절 공감했다. 특히 마지막 말. 이미 늦어 버려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굳이 뭔가를 바꿔보고 되돌려보겠다는 생각조차 없을 때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고 싶다. 그런데도 여전히 뭐가 잘못됐던 건지, 왜 그래야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막막한 기분이 삶이란 문제에선 가장 답답하다.
옷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재단한 옷을 입으면 더 멋져 보인다. 그리고 외모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실은
외모에 관심이 있다. 누구나 다 관심이 있다. 문제는 형편없는 외모인데도 자신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오만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외모가 엉망인 것은 자기 정신이 차원 높은 것에 열중하기 때문이며, 워낙 바쁘다 보니 머리
감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며, 당신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모습 또한 사랑할 것이라고 건방을 떤다. (135)
이건 깍쟁이(?) 올리버의 말. 근데 이런 말 들으면 뭔가 속시원한 느낌. 사람들은 내면과 외면의 기묘한 이분법을 내세워 내면을 가꾸는 사람은 외모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그래야만 하는 것을 일종의 당위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반대로 오로지 외형을 위해 성형에 목숨 걸면서 그렇게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정당화하는 성형광고 프로그램들도 많이 본다. 그 어느 쪽도 자신의 행위를 그 자체로 솔직하게 인정하거나 그 자체의 가치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우습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런데 올리버의 이 말은 인간의 가장 통속적인 욕망에 대한 아주 솔직하고 당당한 발언 같아서 재미있었다. 내면을 아름답게 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외모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대체 왜 나쁜 건데?라는 아주 순진하고 도발적인 질문으로 상대의 말문을 막아 버린 것 같달까.
난 논리정연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를 설득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런 의논은 행복한 거였고, 또 결정도 쉽게 났어.
우리 둘 사이는 늘 그래. 스튜어트는 우리가 내 제안대로 하든 그이 제안대로 하든 그것에 그의 프라이드가 걸려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적이 없어. 난 처음부터 그걸 스튜어트의 매력으로 생각했어. 남자들에게 어떤 계획을 바꾸자고 하면 대부분--설사
무의식적으로라도, 하긴 무의식이 더 나쁜 경우가 많지만--그걸 일종의 모욕 아니면 비판으로 받아들인다고. 남자들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여자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걸 참지 못해. 하지만 금방 말했듯이 스튜어트는 그렇지 않아. (138)
이것은 질리언의 말. 스튜어트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말로서도 재미 있지만, 남자들의 성격 일반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부분도 의표를 찌른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죽자고 덤빌까,하는 의문에 대한 실로 명쾌하고도 유쾌한 대답.
그리고 내 옆에는 뚱뚱하고, 평온하고, 성적으로 진이 빠진 스튜어트가 있었는데, 진짜 꼴사납고...... 즐거워 보였고, 공항에서
날 만나 기분 좋은 척했지만, 아마 속으론 못 쓰게 된 개트위크 빅토리아 구간 왕복 billets(기차표)의 절반을 어떻게 환불받을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당신에게 일러두는데,
스튜어트는 일류 구두쇠 짓도 할 수 있는 친구다. 해외에 나갈 때면 놈은 항상 공항까지 왕복표를 산다. 이유는 1) 2주일
여정에서 천 분의 3초를 절약할 수 있어서, 2) 돌아올 테니까, 3) 그 사이에 있을지도 모를 요금 인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올리버는 항상 편도표를 산다. 브라질의 카니발 여왕이 내 발길을 가로막지 않으리라고 누가 예언할 수 있는가?
다음다음 주 토요일로 추정되는 날 개트위크 guichet(매
표소) 앞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을 사람들을 누가 벌써 걱정하는가? (103-4)
방금 나왔던 질리언의 말도 그랬지만, 이 소설은 상반되는 인물의 캐릭터를 통해 어떤 '유형'의 인물들을 너무도 흥미롭게 제시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산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과 그 무엇 하나 결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고스란히 들여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 논거가 전혀 억지스럽지가 않다. 사람을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이 날카로운 멘트들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재미있다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중으로 보면 분명 부차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나에게 상당히 흥미로웠던 인물은 질리언의 어머니 와이엇 부인. 부인은 그녀의
딸과 사위라는 제3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만 그려지다가, 그녀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관계를 보게 되고, 또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통해 그려졌던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는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이야기에 균열과 흥미가 더해진다. 외도를 떠올리면, 결혼/연인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과 몸을 섞는 것을 즉각적으로 연상해서 사람들은 곧장 '성생활의 문제를 결부시키'지만, 실은 '감정이 예민해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이 통찰은 상당히 재미있다.
내 아이, 내 딸 질리언이 곧 날 보러 올 겁니다. 그 애가 딱해요. 그 애는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있어요. … 그 일에 대한 내 생각? 글쎄, 나는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 내 말은, 그런 편범한 상황에 대해 내 의견이랄 게 없고,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란 말이지요. … 그 애가 딱했고, 그 애 때문에 나도 딱했어요. 이런 일은 자동차를 바꾸는 일과는 다르니까요. … 질리언은 스튜어트를 사랑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얼마나 놀랐는지 설명하려고 애썼는데, 마치 자신에게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투였어요. '엄마,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게 위험한 시기였나 봐. 난 몇 년은 끄떡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애는 내 품 속에서 얼굴을 반쯤 들어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어요.
'항상 위험한 시기란다.' 난 말해 주었지요.
'무슨 뜻이에요?'
'항상 위험한 시기란다.' (183-4)
내 생각은 이래요. 통계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일도 일어나고 저런 일도 일어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요. 그래요.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위험한 시기는 늘 존재한답니다. … 7년이 지나면 위험한 시기랍니다. 7개월이 지나도 위험한 시기고요.
내가 딸에게 말할 수 없었던 건 이거에요. 난 고든과 결혼한 지 1년 뒤에 외도를 했어요.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던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는 외도였어요. … 그런데 이게 아주 놀랄 일인가요? 당신은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갑갑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안전함을 느끼면서 돌연 공포를 느낄 수도 있고요.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신혼 초기는 가장 위험한 시기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 감정이 민감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L'appétit vient en mangeant (먹으면 식욕이 온다). 사랑하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기 쉽죠. 아, 당신도 알겠지만, 난 지금 샹포르와 경쟁하듯 경구를 제시하자는 게 아니고, 단지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렇다는 거죠. 사람들은 그것을 성생활의 문제로 결부시키죠. 바로 누군가가 침대에서 그 또는 그녀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답니다. 그건 마음과 관계가 있어요. 감정이 예민해지면, 그게 바로 위험한 거랍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기를 딸에게 할 수 없는지 아세요? 아, 질리언, 난 정말 이해한단다. 난 말이야. 네 아버지와 결혼하고서 1년 뒤에 외도를 했는데,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란다. 어떻게 이런 폭언을 그 아이에게 할 수 있겠어요? 내 왜도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건 비밀로 할 이유도 없지만 말해서 좋을 것도 없는 거예요. 딸아이는 나름대로 자기 운명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끔찍스럽게도 어미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생각게 하는 건 잔인한 짓이고요. 그런 건 아는 게 병인데, 무자비하게 알려 줘서 딸애를 괴롭힐 순 없어요.
그래서 나는 말하지요. '항상 위험한 시기란다.' (2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