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내 말 좀 들어봐

review/book 2010. 6. 27. 19:03

난 보통 한 권의 책을 끝내려면 열 시간 이상이 필요한데, 연속해서 그렇게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면 자꾸 소홀해져서 책을 끝까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아마도 전형적인 반동적(reactive) 인간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동분자'라고 말할 때의 반동과 한자는 마찬가지일 텐데, 철학적으로 '반동적'이라고 사람을 말할 때는, 능동에 반한다는 의미다. 자신의 능동적 의지에 의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능동적 힘에 반해서만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누가 어떤 일을 시키면 그 시키는 일을 하기 싫어서 굳이 딴짓을 하는 사람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유형의 사람은 누군가가 시키는 행위가 선행되지 않으면 자신은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때 워낙 책 읽을 시간은 없고, 억지로 해야 하는 다른 것들이 많다 보니, 그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내 의지대로 내가 시간을 조직하고 행위하는 것이 허락된 이후에는 오히려 책을 훨씬 덜 읽는다.

어쨌든, 그런 곡절(?) 속에서도 줄리언 반스의 『내 말 좀 들어봐』는 또 마쳤다^^V 왜들 이 책을 그렇게 재밌다고 했는지 충분히 공감됨.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그랬었는데, 이 작품 역시 '장르'의 형식을 뒤집는 시도로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킨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경우엔 도저히 재미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소설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묘하게 장르를 비틀어 씀으로써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말 좀 들어봐』는 불륜아침드라마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를, 각자의 진실을 말하는 인물들의 독백 혹은 방백을 통해 천박한 가십거리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서사의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이 소설 속 사랑의 재미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시쳇말로 하자면-- 찌질한데도,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의 매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통속적 사랑을 다루는 대부분 드라마 속 사랑이나 캐릭터가 재미없는 이유는, 언뜻 찌질하거나 비인간적인 인물 속에 사실은 숨겨져 있던 완벽한 매력이나 인간미 같은 것이 있다,는 것으로 그들의 결함을 벗겨내기 때문인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런 완벽함을 상정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많은 경우 오히려 비루하기까지 한데도 어쨌든 그 안에서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표면상 '동일한 사건'을 경험하는 각자의 감정이 각자의 서술 속에서 중첩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사건의 '동일성'이나 '진실성'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을 흔들어 놓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분명 각 인물들의 허세나 가식을 만나기도 하지만, 불쾌하기보다는 어쨌든 웃음을 주고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뭐랄까, 불륜(?)을 '상식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여전히 재미가 있다는 것이 작가의 대단한 능력 같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대사에서 시사되는 바도 그렇고, 글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분명 이 작품은 '희곡' 같은 느낌을 주는데, 나는 사실 인터뷰 형식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도 받았다. 각 인물들이 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마치 카메라 뒤에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거나, 혹은 자신이 한 인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인물에게 전해주며 그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인터뷰어 같은 존재가 연상된다. 어떤 것이 됐든, 누군가가 늘어놓는 자기의 이야기,라는 형식만을 취하고도 이렇게 위트있고 흥미를 잃지 않는 서사를 엮을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능력이다.

참고로, 번역자는 이 소설의 원제인 "Talking it over"를 '의논, 설득, 상담' 등의 (일종의) 의역으로 제시했는데, 사실 'Let's talk it over.'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하나하나 되짚어서 죽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자.' 뭐 그런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번역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talking it over'는 각 인물들이 사건을 되짚어가면서 한 번 이야기해 보면서 사실관계도 확인하고 뭐 그러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 뉘앙스를 지닌 우리 말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런 서사에 붙일 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우열을 가리자면 --굳이 누가 가리라고 한 건 아니지만 ㅋ-- 서사의 내용으로서는 『내 말 좀 들어봐』가 분명 재미있고, 이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삼각관계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다룬 재미도 있긴 한데, 뭐랄까,『플로베르의 앵무새』가 도저히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을 소설로 써냈다는 점에서 훨씬 기발한 것 같은 인상이 있다. 그리고 작가가 쓴 작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더 개인적인 소회가 담겨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어서, 작가 줄리언 반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아래는 『내 말 좀 들어봐』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구절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