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남다른 삶

grey room 2010. 6. 29. 16:20
얼마 전에 무릎팍도사 '강수진'편을 재방송으로 본 적이 있다. 난 발레도 잘 모르고 그다지 좋아한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역시 뭔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밀고 나가 깨는 사람에겐 남다른 면모가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처럼 누군가를 남다르다고 느낄 때는, 그 사람의 삶이 더없이 간소할 때.

강수진씨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발레를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 아름다움을 스스로 구현하고 싶어 한국무용 대신 발레를 택했다. (물론 그녀는 어떤 선생님이 발레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그 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시작했을 뿐이라고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그리고 나서  중학생의 나이에 모나코에 홀로 유학을 떠나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발레를 해오면서 그녀는 항상 같은 시간에 기상하고 스트레칭하고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는 아주 단순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엔-- 심심하기 짝이없는 일상을 한결같이 살아내고 있다. 심지어 국제결혼이라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7년동안이나 기다려 허락을 받아 하게 된 결혼조차도 시청에서 남편과 시부모님만 모시고 아침에 간단히 식을 올린 뒤, 10시반에 발레단에 출근해서 평소와 똑같이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귀엽고 아름답다고 항상 말해준다며 웃는 그녀의 표현이 전혀 요란스럽지도 않고 진심어리게 느껴졌다.

보통의 우리들은 삶의 번다함에 대해 항상 불평하면서도 그 번다함을 덜어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결혼식이 싫다, 직장생활의 불합리함에 숨이 막힌다, 어쩌다 뒷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 삶의 리듬을 바꿀 능력은 전무하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들은 단지 우리의 의지박약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실은 어찌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김연아를 봐도 그렇고 몸을 사용해 자신을 표현해내는 예술가들이 어떤 성숙한 아우라를 풍기는 건 바로 삶을 그토록 단순하게 스스로 다듬고 단련해낼 수 있는 강인한 제어의 능력이 표현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너져버리면 그들이 담아내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손끝의 표현은 바로 그 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강수진의 경우도 --단지 치료를 받으러 갈 시간을 내는 것조차 당시엔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5년동안 발목에 미세한 금이 간 채로 연습하고 공연하다가 결국은 걸을 수조차 없게 된 상황에서 1년 반동안 휴식과 치료를 하다보니 근육은 금세 보통사람의 그것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 모두가 이제 끝났다고 말하던 그 순간 그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이 부상과 재기 스토리가 그런 단순한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 곧 예술도 함께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그런 일이 있어났을 경우 삶을 되찾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그저 처음의 방식,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란 사실도--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내게 있어 가장 남다른 사람은 화려하고 글래머러스한 유명인이 아니라, 삶을 극한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강수진의 남다름과 아름다움이란, 손끝과 발끝의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번다하지 않고 단순한 삶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