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소품 가운데 길 가던 중 갑작스레 눈을 뜬 소경의 이야기가 있다. 시력 없이도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도 불편도 없던 이 소경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눈을 떠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에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자신을 구속했던 암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경악과 당혹감에 휩싸였다. 세상이 갑자기 미로가 되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를 보던 어떤 행인이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그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 행인은 그에게 '아니, 그게 뭐가 걱정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들었던 This American Life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청력이 없었던 스캇 크레펠(Scott Krepel)이라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달팽이관 이식을 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들게 되었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간단히 소개되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온 소리는 '무엇의'라거나 '어떤' 소리, 말하자면 새 소리, 어머니의 목소리, 피아노 건반 소리 같은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귀를 우르르르 울려대는 진동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가 이식 수술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뒤, 소리가 없는 세상 속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리도 빛도 맛도, 즉 청각도 시각도 미각도 그런 의미에서는 '분절(articulation)'의 문제다. 영어에서는 누군가가 뭔가를 두루뭉수리하게 뭉뚱그려 말을 하면 "Articluate"하라는 표현을 써서 요청을 한다. 이 말을 우리 말로 옮길 때면, 나는 --아주 문법적이거나 이론적인 상황이 아니면-- '상술하라'거나 '좀 더 상세히 말해 봐라.'라고 옮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세부사항 면에서 살을 잘 붙이라는 것이 아니다. 정황상 살을 더 붙여서 말해 보라는 것으로 옮겨지지만, 실은 한데 뭉뚱그려져 윤곽이 없는 살덩어리를 결에 맞게 나누라는 것에 더 가깝다. 그것이 분절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종종 이상화해서 말하지만, '분절'되지 않은 채 뭉뚱그려진 것이 우리의 경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긴 힘들다. 우리가 한국어에서 더 이상 'ㅔ/ㅐ' 나 'ㅚ/ㅙ/ㅞ'를 구분하지 못하고 쓰는 것은 '실제로' 그 소리 속에 차이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분절의 체계가 --어떤 이유에서든-- 허물어졌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다른 소리라 해도 하나의 범주 안에 들어가서 같은 소리로 인식됨으로 인해서이다.분절이란 일종의 여과 기능이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그리고 아득하게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는 분절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뭉뚱그려진 둔중한 진동으로만 다가올 뿐,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싼 , 눈을 감지 않는 한 매 순간 우리를 압박해오는 우리를 둘러싼 시각적 세계에 우리가 어떤 여과 장치를 만들지 않고, 분절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시각에게 압도를 당할 뿐, 어떤 것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TV 화면에는 온갖 영상들이 난무한다. 저토록 한심한 것들이 그냥 만들어져서 이 세상 속으로 던져지는구나,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게 하는 영상들도 많다. 활자들도 마찬가지다. 저런 것을 만들기 위해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사람들의 공력이 투여되고 세상 속을 돌다 그저 쓰레기인 채로 어딘가로 흘러가겠구나 생각되는 것들이 허다하다. 헌데 어쩐다. 나는 그처럼 나에게로 쏟아지는 빛들 소리들 활자들 속에서 번번이 길을 잃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