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만에 혼자 공연을 갔다. 한동안은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기도 했는데, 또 한동안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 좋아서 누군가와 함께 공연가는 걸 즐겼다. 결론은? 둘 다 괜찮다. 하지만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공연은, 어쩐지 혼자 가서 더 좋았던 것 같다.
1.
1부는 올해 발매된 'All Days Are Nights: Songs for Lulu'라는 앨범을, 매 곡 사이에 휴지부 없이 연가곡(song cycle)이라는 형식으로 죽 연결해서 공연하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기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출연부터 퇴장까지가 전부 공연의 일부이므로 박수를 치지 말고 들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앨범은 올해 초, 희귀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앨범으로, 그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또 음악이라는 세계로 이끌어준 어머니라는 존재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과 더불어 고마움을 전하는 앨범...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솔직히 1부에는 별로 몰입하지 못했다.
내가 아티스트-특히 현대음악/현대미술을 하는 아티스트-의 감성과는 다른 범속...하다 못해 천박한 감성밖에는 지니지 못했다고 느낄 때가 그럴 때인데, 1부 공연에서 루퍼스는 목과 어깨 뒷쪽으로 빙 둘러 장미 모양인 듯하게 천에 구김을 주어 만든 장식이 묵직하게 달린, 바닥까지 길게 끌리는 실크 느낌의 나이트 가운 같은 의상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렇게 해서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공연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드는 생각이라곤 '저 어깨 장식 무겁지 않을까? 피아노 치는 데 걸리적거리진 않나?'라는 것 뿐이었다-_-;;; 게다가 역시나 공연의 일부라고 하는, 더글러스 고든이라는 사람이 루퍼스 웨인라잇의 눈 영상을 가지고 작업했다는 천천히 껌뻑거리는 검은 눈동자 영상은 나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키기 이전에 그저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서울 뿐이었다-_-; 아 놔. 내가 생각해도, 이러고 무슨 예술을 이해하겠나 싶다. 그치만 정말 눈만 똑 잘라낸 영상이 때로는 한 개였다가, 또 어떨 때는 여남은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껌뻑대는데, 전혀... 교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 루퍼스-
그나마 조금 들었던 생각이라곤, 왠지 이 앨범의 곡들은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좀 안다면 훨씬 더 잘 이해가 갈 것 같다는 그런 것이었다. 왠지 현대 대중음악의 느낌이라기보다는 다소 과장된 오페라의 감정과 감상이 묻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 오페라의 아리아들이 그 웅장하고 장중하거나 부드러운 선율에 묻혀 그런 노래인 줄 짐작도 못하다가, 가사의 내용을 찾아서 보면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어서 웃었던 기억이 있어서... 암튼 마지막으로 Zebulon까지 연주를 끝내고 나이트가운을 끌며 루퍼스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텅 빈 무대를 보며 사람들이 마침내 오랫동안 숨죽인 채 기다렸던 박수를 치고 1부가 끝났다.
2.
2부에서 루퍼스는 뭔가 무늬 같은 것이 있는 까만 티셔츠에다, 파충류 피부같은 느낌의 거뭇거뭇한 무늬가 있는 주황색 라텍스 재질의 쫄바지에, 빨간 땡땡이가 있는 꽃분홍 스카프를 메고 나타났다. ㅍㅎㅎ 솔직히 이 의상 보고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게이는 꼭, 반드시, 필연적으로 이래야만 하는 거야?라는 생각도 들었고. 암튼 그 옷은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ㅋㅋ
그러나 한결 가벼워진 2부 무대에서의 루퍼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순서상의 차이가 조금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셋리스트는 도쿄 공연을 포함한 최근 공연의 셋리스트와 대동소이했던 것 같다. 어쨌든 Beuty Mark의 경쾌한 연주로 2부의 문을 열어 대체로 히트곡이라고 할 만한 곡들 위주로, 곡 사이사이에 가족과 친구에 관한 이야기와 농담, 곡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연주하고 노래했다.
이를테면, Memphis Skyline이라는 곡은, 제프 버클리와 인연이 있는 곡이라며 그 곡을 만들게 된 비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를 직접 만나기 전 음악과 방송을 통해서만 알았을 때는, 자기보다 인기도 있고 잘생긴 이 가수를, 자기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질투하고 미워했는데 막상 직접 만나서 어울려 보니 결국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절대 게이 사이의 연정이 아니라, 우정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심지어 그날 만났을 때 같이 잔 적이 없다는 말까지 하면서, 사람들은 게이들끼리 논다고 하면 이런 걸 궁금해하는 것 같다고 미리 밝혀두는 게 좋겠다면서 얘기를 해서 폭소를 자아냈다.) 그런데 그렇게 딱 한 번 직접 본 지 2주 뒤 제프 버클리가 멤피스에서 사고로 죽고 --평소에도 가끔 수영을 하던 강이었는데,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죽었다고-- 그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들으면서도 --루퍼스가 워낙 뭉개듯 노래를 불러 발음이 좀 부정확해서이기도 하지만-- 곡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 설명을 듣고보니 가사의 의미가 비로소 잘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물랑루즈에 수록되었던 'Complainte de la Butte'는, 파리의 지명인 '라 뷰트'에 관한 노래, 즉 '라 뷰트의 애가(哀歌)'라는 뜻인데, 간혹 미국 사람들 중엔 "저 당신 그 노래 정말 좋아해요, the complaint of the butt (엉덩이의 불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진중했던 1부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런 농담도 해가면서 훨씬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심지어 한 곡은 노래를 하다가 실수를 해 버렸는데, "1부에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죠?"라며 웃더라는. 그 얘길 들으니, 그 온갖 폼과 무게를 다 잡은 1부에서 그런 실수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서 정말 웃겼다.
그런데 역시 "Cigarettes and Chocolate Milk"가 제일 좋았다. 2부의 마지막 곡으로 이 곡을 남겨뒀는데, 뭔가 흥에 취해 마지막 부분의 간주를 자유롭게 변형해서 연주하니 곡의 분위기가 훨씬 사는 것도 같았고, 나도 곡에 취하는 기분이었고 앨범으로 들을 때보다 현장에서 직접 들으니 훨씬 좋았다. 상대적으로 2부 중반 정도에 불렀던 "Hallelujah"는 너무 감정이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니까, 나로서는 오히려 좀 별로였던 것 같다. 그 곡은 분위기를 좀 눌러서 뭔가 억눌린 감정이 천천히 새어나오듯 불러야 그 절절한 느낌이 가느다란 신경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드는데, 뭐랄까, 곡이 너무 업 돼 있었달까. 뭐 그래서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그리고 앵콜을 부르러 나와 첫번째로 Poses를 부른 뒤, 두 번째 곡을 부르기에 앞서 루퍼스가 이른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자기의 어느 앨범이 잘 나가는지 몰라서 각각 다른 앨범에 수록된 두 곡을 전주 몇 마디만 연주해 볼 테니, 좋아하는 쪽에 박수를 쳐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반응에 따라 앵콜 곡을 결정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결국 불러준 곡이 'Going To A Town'. 딱 듣고 싶던 곡이라 난 좋았다. :) 아마도 다른 곡은 'Vibrate'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실 전주만 듣고 곡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좀 떨어져서 확실치는 않다.
마지막으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름다운 노래 'Walking Song'을 커버곡으로 부르면서 공연을 마쳤다.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순간을 곡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곡이 정말 좋은 것은 곡 자체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곡으로 인해 그 순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나와보니, 하루 짜리 공연인지라 포스터가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연기획자들이 공연장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들을 팬들이 떼어가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잽싸게 한 장 떼 왔다는. ㅋㅋ
헌데 이번 공연 전체에 대해서는 다소 착종된 감정이 있었는데, 우선 이번 새 앨범에 관해서는, 그의 절절한 감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특히 그 공연 기획에 있어서는 그 컨셉이나 곡이 나에게는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곡을 쓸 수 있다는 그 능력이나 마음은 부럽고 아름다운데, 그 결과물 자체는 뭔가 감정과잉으로 느껴졌던 느낌. 시간이 더 지나서, 혹은 그런 크나큰 아픔을 겪게 된 상황에서 그 곡을 다시 듣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이 어떻게 다르게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어깨가 과장된 나이트가운에 대한 불편함과 의아함 이상의 감정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앨범을 많이 내고 자신의 음악세계가 확고해지며 중견급이 된 뮤지션들의 곡을 들을 때 간혹 불편하기도 한 것은, 뭔가 음악에 대한 자의식이나 진지함이 지나쳐 무겁거나 기교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루퍼스에 대해 이런 느낌을 받는 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그의 음악세계에 내가 충분히 들어가고 몰입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어쨌든 이번 공연 1부의 컨셉이 나에겐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결론은, 이번 콘서트는 무엇보다 'Cigarettes and Chocolate Milk' 와 'Poses' 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의미있는 공연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루퍼스의 감상에 따르자면, 미국의 관객들은 한시도 조용히 있질 않아서 연주하고 있을 때까지도 시끄러워서 조용히 시키는 게 일이고, 일본의 관객들은 시종일관 조용해서 분위기를 띄우느라 힘들었는데, 한국 관객들은 연주 중엔 딱 숨죽이고 있다가 곡이 끝나면 열광적으로 반응을 해줘서 딱 좋았다고 하긴 하던데, 과연 다시 공연을 하러 올지 상당히 의문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가길 잘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지금의 모습이 다소 과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었더라도,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의 일대기, 음악의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이런 공연은 그 사람의 음악의 생로병사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의미에서 역시나 한 번쯤 볼 만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