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에 대한 무참한 실망감으로 인해 '과거가 촉망되었던' 인디밴드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아진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브로콜리 너마저'의 2집은 도리어 상당히 만족스럽다. 가을방학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이 앨범을 들으면서 느낀 건 1집에서 계피 목소리의 매력을 끌어낸 건 결국 밴드 리더(리더라고 하는 게 맞나?) 덕원이나 프로듀서의 힘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것.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앨범 1번 트랙 '열두시 반'이라는 곡의 도입부 여성보컬을, 드럼을 치는 류지가 불렀는데, 물론 목소리도 전혀 다르고 가창력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계피가 1집에서 불렀을 때의 기교 부리지 않고 담박하고 풋풋한 느낌을 어쨌든 류지 역시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그리고 바로 그런 점, 소녀가 아니라 학생 같은 느낌의 꾸밈없는 발성과 음색이 어찌나 싱그럽고 좋던지. 그런데 사실 앵콜요청금지 EP 때 계피 노래를 들어보면 그다지 다듬어지거나 타고난 가창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정말 계피 목소리는 지나친 가공의 과정을 거쳤다는 생각이 들 따름. 그리하여 가을방학으로 간 계피의 보컬이 이젠 너무나 흔해빠진, 전형적인 '홍대 인디 씬'에 강림하신 '여신'님들의 몰개성적이고 예쁘기만 한 목소리와 비슷해지고, 심지어 약간의 콧소리까지 섞어내서 경악케 했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결국 보컬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음성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떤 음색을 내느냐를 결정하는 데는 밴드의 성격이나 프로듀서의 힘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랜드민트의 계피 소리를 들은 이후로 정말 매끈하고 달콤한 여성 보컬의 목소리라면 이젠 아주 경기할 지경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특히 모든 밴드나 모든 곡이 라이브로 듣고 현장에서 함께 호흡한다고 더 좋은 건 아니라는 실감을 했다. 물론 라이브의 묘미란 반드시 노래를 앨범에서 듣던 그 퀄리티대로 듣는 데 있다기보다 그 뮤지션의 음악을 같은 시공간에서 듣고 노래한다는 현장성 그 자체를 즐기는 데 있긴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일정 수준의 음악적 일관성은 유지하기를 기대하는데 어떤 밴드들은 앨범과 라이브의 격차가 너무 심할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무래도 브로콜리 너마저의 경우. 계피의 탈퇴 후 사실상 여성 보컬 밴드에서 남성 보컬 밴드로 불가피하게 전환하게 된 브로콜리 너마저의 메인 보컬은 덕원이 맡고 있는데, 소위 가창력으로 강하게 어필하는 보컬이 아닌 그의 특성상 라이브에서 분위기를 지나치게 타고 흥분하면 음정이 더 심하게 불안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지난 번 지산에서 들었을 때 '졸업'이라는 이번 앨범 타이틀곡(이 맞겠지? 앨범 제목과 같은 걸 보면.)에 대해 특별히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제목과 가사의 싱크로율이 지나치다 못해 약간 유치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데다 -88만원 세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표상된, 불안한 청춘을 너무 노골적으로 노래한 것 같았달까- 덕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쳐대던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는 세상이 미쳤다기보다 그가 더 흥분한-좀 심하게 말해서 미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다소 기괴하기조차 했던 터라. 그런데 안정된 보컬로 부른 이번 앨범 속의 이 곡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와 '울지마'는 역시나 좋았다. 그런데 덕원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 다른 남자가수가 부르는 '울지마'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데자뷔에 자꾸 시달리고 있다.-_-; 이 느낌 대체 뭐지???
그 외에 '열두시 반'으로 열어 '다섯시 반'으로 끝나는 앨범의 시작과 매듭 역시 흥미로웠다. 다른 부분의 구성까지 세세히는 모르겠는데, 나는 이 앨범의 이런 시작과 끝의 구성이 나름 재미있었다. 여기서 '열두시 반'은 새벽 열두시 반을 가리키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눅눅한 버스'를 타고 졸다가 돌아갈 버스마저 끊겨버린 시간인 12시 반에 낯선 정류장에서 내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채 지치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밤 거리를 걸어가는 어떤 장면으로 서사가 시작되는 셈. 그리고 마치 그렇게 모두가 잠든 밤을 잠들지 못한 채 꼬박 지새던 한 청춘이 '아침해가 날아들'길 기다리는 묘한 희망으로 이 앨범이 매듭 지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 사실 '희망'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밝은 느낌은 아니고, 오히려 '위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이 앨범의 전체적인 톤 자체가 뭔가 '위로가 되지 못한 위로'를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 어쨌든 이 시작과 끝의 구성은 아침에서 밤으로 가는 하루의 시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밤의 한 끄트머리로 들어가 어둠의 터널을 지나 아침을 맞는 느낌을 주어서, 이 앨범을 죽 관통해서 청춘의 어떤 정서적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자꾸 계피의 탈퇴와 이 밴드를 연결해서 생각하다 보니, 그 사건이 뭔가 밴드 이름과 무관치 않았던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뭐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렇게 들리긴 하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라라라'에 출연했을 때 그랬던 거 들은 적 있는 듯.) 암살 당하던 순간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했다는 케사르의 그 유명한 마지막 한 마디를 변형해서 지었다는 이 밴드명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믿었던 사람에 의한 '배신'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달까. 그래서 자꾸 '너마저'씨가 누구였을까라는 상상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홀로 궁금증 증폭시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는. ㅋ
암튼 브로콜리 너마저 2집에 대한 자유연상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