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운이 좋았다. 이병우의 '새' 연주를 한 해 동안 두 번이나 눈앞에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제는 이병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다녀왔다. 예술의 전당에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해왔던 기획 공연이었던 모양인데 올해는 이병우를 섭외한 것이다. 본인의 창작곡이 아니라 그런지 잘 알려져 있는 앨범은 아니지만, 사실 이병우는 1995년에 실제로 크리스마스 앨범까지 낸 적이 있다. (난 대학원 다니던 시절 중고 CD를 파는 이대앞의 어느 음반 가게 가판대를 뒤지다가 우연히 그 음반을 찾아내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산 적이 있다. 아마도 3만 원쯤 했던 듯. 그래도 돈이 아깝긴 커녕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앨범.)
아무래도 가볍고 긴장이 많이 되지 않은 분위기라 그랬던 건지 뭔지, 이병우 콘서트에 10년째 가면서도 그런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첫 곡 연주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기타 줄이 하나 끊어졌다는. 참 별일이라면 별일이었는데, 그 상황까지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1부 마지막 순서 즈음에 이병우 콘서트에선 이제 나름 고정 게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장재형이 언제나처럼 나와서 자장가+돌이킬 수 없는 걸음(장화 홍련)과 연애의 목적(연애의 목적)을 불렀는데, 역시 이 곡들은 장재형의 목소리와 창법이 아니라면 절대 그 색깔이 나올 수 없는 곡이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 시켜줌. 이병우가 자신이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자기가 애정을 가진 만큼 대중적 호응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은 가수라고 소개를 했는데, 사실 이병우가 써 준 곡들 외에 장재형 본인의 정규앨범 곡들은 목소리를 섬세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자신의 장점을 별로 살리지 못한 곡들이어서 다소 의외이면서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이병우가 가사를 붙인 곡들을 좀 더 많이 써서 주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ㅋ
아무튼 공연에는 그의 크리스마스 앨범에 포함되어 있던 8곡의 캐롤 가운데 5곡이 연주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외 앨범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캐롤 한 곡이 추가되었고, 그 외는 주로 영화 음악이 선곡되었다. 연주의 기교는 물론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거니와, Jingle Bells 나 Santa Claus Is Coming Town 같은 동요의 느낌이 강한 캐럴들을 일렉트릭 기타를 위주로 강렬하게 편곡한 그 솜씨가 역시 천재적이었다. 춤추고 싶어졌는데 다들 너무 얌전히 앉아 있어서 살짝 안타까웠던. 역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라는 공간이 주는 무게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그러나 2부에 관악 연주를 위해 등장한 'Common Ground'라는 브라스 밴드의 금관악기 주자들은 옷차림도 청바지에 형형색색의 스웨터와 후드티를 자유롭게 입고 무대에 올라오더니만 역시나 자신들이 연주를 하고 있지 않을 땐 리듬에 맞춰 꽤 흥겹게 건들건들 몸을 흔들었다. (춤이라고 하기엔 좀... ㅋㅋ)
이 공연 제의를 받고 대한민국 최고의 극장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면 기분이 어떨까,라는 생각에 꽤나 설렜다고 했던 본인의 말처럼, 무엇보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의 흥에 한껏 취해 연주하던 이병우의 설렘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와서 더 즐거웠던 공연. 물론 나의 자리가 한가운데 둘째줄이라 이병우가 '실제로' 종종 나와 눈을 마주쳐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는 기분에 내가 또 한껏 취해 들떠 있기도 했었지만. 이병우의 연례(?) 콘서트가 10월에 끝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나도 12월에 이런 특별 공연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알게 되어 가게 됐던지라, 아무래도 이병우 팬들은 별로 오지 않아서였는지 앞자리를 예매하는 것이 평소보다 훨씬 수월해서 정말 믿을 수 없는 자리를 예매했던 것.
게다가 공연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크리스마스 선물의 의미로 경품 추첨을 하는 시간도 있었다. 바로 이번 달에 출시되는, 이병우가 개발하여 '기타 바(guitar bar-울림통이 없이 목만 있는 형태)'라고 이름붙인 기타를 관객 중 네 사람을 추첨해서 선물로 주었다.
정말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첫번째로 불렸던 자리가 나의 바로 뒷자리였는데, 심지어 그 자리는 비어있었다는! 그냥 앞자리 사람에게 줬으면 했던 간절한 바람이 있었지만 입도 달싹 못해보고- ㅠ.ㅠ 암튼 선물 받은 사람들 너무 부러웠었다.
그 와중에 본인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도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꽤 귀여운 이야기였다. (말솜씨야 뭐 한결같은 눌변이었지만.) 이병우는 지금은 책을 별로 읽지 않지만, 어릴 때는 책을 꽤 좋아해서 주로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의 청소년 잡지를 정말 목을 빼고 기다려서는 받아갖고 봤다고 한다. ('꺼벙이' 등의 만화 때문이었다는데. 그걸 '책'을 좋아했다고 말씀하시는 당신 최곱니다 ㅋㅋ) 그건 아버지가 사다주셔야 볼 수 있었는데, 약주를 좋아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주를 한 잔 걸치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문앞에 들어서면서야 '아이구. 잊어버렸네.'해서 그 겨울엔 연달아 거의 일주일을 실망과 배신감을 안겨주셨단다. 일주일을 그렇게 실망시킨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에도 또 거나하게 취해서 눈오는 밤에 돌아오셨다고 한다. 초인종이 울리자 버선발로 뛰어나간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어떡하지. 또 잊어버렸네.'라고 하시는데, 그 순간 이병우가 보니까 코트 안쪽으로 해서 바지 뒷춤엔가 책을 숨겨 놓으신 게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엔 무뚝뚝하셔서 그런 장난 같은 거 치시지도 않는 아버지가 술기운에 그러시니까, 그 짧은 순간에도 '거기 있잖아요.'라고 하며 그냥 꺼내 가야할지, 아니면 장단을 맞춰 드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고. 결국은 '아빠 미워'를 외치고는 훽 돌아서 들어가는 것으로, 아버지 장단에 맞추면서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을 '배려'해야 될 때가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는. ㅋㅋㅋ
암튼 그렇게 해서 경품 추첨 타임이 끝난 뒤 세 곡의 캐롤을 연달아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또 잊지 않고 '새'를 연주해주면서 공연이 끝났다. 같이 갔던 친구 역시 그 곡 하나 들은 것만으로도 표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 공연은 8시에 시작했었는데, 그러고 나니 거의 10시 40분이 되어 있었던. 뭐, 크리스마스니 뭐니 그런 건 내게 별로 의미가 없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이병우 공연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