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책을 정치하게 분석하거나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 읽어가지고는 안 되겠지만,
일단 '인상'만이라도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무엇보다 웃기다.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게 그렇게 웃기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신랄한 풍자, 날카로운 유머에 나도 모르게 낄낄거리면서 웃게 된다. '뇌가 쫄깃해'질 정도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다고 했던 키드니의 말이 정말 독서의 욕망에 관한 한, 무릎을 치게 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이 내게는 간만에 그런
책이었다. 이론서라든가 철학책을 읽고 온갖 '사유'가 요동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런 책을 읽으면 별 감흥이 생기지도 않고, 오로지 목적론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무미건조하게
채취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책은 엄밀하게 '이론서'라고 하기는 좀 힘들지만 --오히려 좀 더 자기
주장이 강한 '논서'라든가, <공산당선언> 같은 팜플렛에 가까우려나. 팜플렛이라기엔 또 분량이 너무 많긴 하고.-- 어쨌든 명백히 소설류의 문학은 아니고,
문학이론가이자 맑스주의자로서의 테리 이글턴의 농밀하면서도 기지 넘치는 사유가 돋보이는 책이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이론서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생각의 켜들이 너무나 조밀해서 그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아 몇
줄, 몇 페이지만 읽고 나서도 한참씩 생각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이런저런 TV 프로그램까지 보느라 책을 자주 손에서 놓았더니, 미주며 역자후기 같은 거 다 빼면 본문 분량은 불과 20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책 한
권을 다 읽는데 3주가 넘게 걸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재미있다는 생각 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표면적으로는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하고, 실제로 그들을 대놓고 까대는
구절들에서 폭소를 자아내는 때가 꽤 많았으며, 그러한 시류에 대한 이글턴의 비판이 이 책 저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실제로도 이 책의 원제가 『이성, 믿음 그리고 혁명: 신(神) 논쟁에 관한 성찰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이라는 점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이
책은 근본적으로는 종교와 신앙,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과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다. 디치킨스('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줄여 부르기 위해 테리 이글턴이 사용한 표현)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도, 나 역시
지하철이나 명동 한복판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기독교인들,
혹은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선의를 가장해서 개종을 강요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며 불쾌했던 경험을 떠올리다 보면,
사실 디치킨스를 설명하는 몇 마디 말만 들어봐도 그들의 생각에 쉽사리 편향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대해 비판하는 이글턴의 글을 읽고 내가
당장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의 책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기독교인의 긍정적 면모를 발견하고, 확실히
디치킨스가 비판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지점에서부터 기독교를 사유하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 동의할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정적으로 나처럼 거의 무신론자에 가까운 종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기독교를 접할 때 신의 '존재론'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까다롭기도 한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중심적 하나님'이 아닌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해석하는 부분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논객으로서 그가 자신의 사유를 벼려서 날카롭게 휘두르는 그의 태도 자체에 깊은 감흥을 받았다. 오죽하면
이 책을 읽고 나니, 국문과의 필독서여서 꾸역꾸역 읽기는 읽었지만 내용이 뭐 하나 기억도 나지 않는 시커먼 표지의 『문학이론입문』이 다시 읽고 싶어졌을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초반엔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을 좀 쳐넣었는데, 나중엔 책을 거의 통째로 입력해야 될 지경에 이르러 제대로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어서 그건 포기해 버렸다. 나에게 그만큼 이 책은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종교, 특히 기독교라는 특정 분야에 관한 이론이나 사상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그의 통찰에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 한편으로는 마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에 관한 입장이나 이론이 분명한 벨로가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궁금증도 생겼다는. (혹시라도 읽어볼 생각이 들면 기꺼이 빌려드리겠소. ㅎㅎ)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소 도발적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신을 옹호하다』라는 한국어 제목은 간명하게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주헌 씨 번역도 적절한 수준의 각주가 들어가 있으면서 좋았고.
디치킨스[각주:]가
기존 종교에 퍼붓는 비난 중 아주 많은 부분이 지극히 옳은 소리이며, 종교의 문제점들을 그토록 설득력 있게 제시한 데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 마땅하다. 예컨대 아동에 대한 성직자의 성적 학대, 종교의 여성 비하 따위에 관한 비판은 아무리 혹독하고
과장스럽다 해도 지나치다고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경우에 디치킨스는 해당 종교에
관해 정말 어이없으리만큼 무지한 상태에서 열변을 토하곤 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영국 조류도감』을 어쩌다 좀
들여다 봤다고 해서 생물학의 심원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오만에 비유한 바 있다. 혹자는
디치킨스를 두둔하면서 그들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다루었지 신학을 논한 게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컨대 파시즘의
신조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떻게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파시즘을 논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데니스 터너는 "일부
무신론자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사실 놀라울 정도다."라고 말했다. 스티븐 멀홀도 비슷한 맥락에서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자의 미신적인 생각"을 거론하고 있다. 신학에 대한 이해가 원초적인 수준(사탄의 수준이라 할까)을 넘어서는
무신론자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적이 없는 미국인만큼이나 드물다. (71-72)
☞ 학자로서의 그의 성실성에 대해 무한신뢰가 생기게 만든 부분.
사실 종교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상팔구 종교를 잘못 이해하게 마련이다. 어리석은 만큼이나 해롭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를 꼼꼼하게 연구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아직 읽어야 할 『전쟁과 평화』가 곁에 있고 아이들도 방에 데려가 재워야 할
판에 유대교 카발라주의자, 신비술사, 장미십자회원들이 도대체 무슨 비의를 지녔는지를 알아보고자 귀한 시간을 들일 사람이 있을까? 따라서 종교를 상대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그럴 자격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이 경우가 적잖다. 문학이론을 비판하며
논변을 토하는 사람들 다수가 문학이론을 읽고 나서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기 때문에 읽지도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74-75)
☞ 뜨끔 ㅋㅋ
다원주의의 시대에 신념은 관용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신념이란 우리가 용인해야 할 대상 중 하나이며 신념과
관용은 서로의 존재 조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신이라는 개념을 무척 싫어해서, 대단치도 않은 이 일상적 개념을 놓고 온갖 이론을
동원해 소동을 피운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근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 역시 확신에 대해서
야단을 떨지 않는가.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치켜세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확신이 권위주의적이라고
의심하며, 따라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믿고 주장하는 듯한 사람들을 경계한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과잉반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전체주의 정치는 동시대의 진실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뒤이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진실의 처지가 위태로워지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언가에 대해 굳은 믿음을 지니는
것과 어떤 좋지 않은 믿음을 지니는 것의 구분이 위험할 정도로 애매해져서, 신념 그 자체가 독단으로 비난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78)
☞ 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맹점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던 것 같다.
믿음은 그게 어떤 종류든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뭔가를 믿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경우보다는 그냥 이미 믿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아니면 적어도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쪽을 믿겠다는 의식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결정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에 사로잡힌 상태와
연관된다. 믿음은 본디 의지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현대 사회가 그토록 물신화한 의지의 기능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의지에
대한 숭배는 미국의 특징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느니, 안 된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말라느니, 누구나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느니-- 이런 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망상이다. 적잖은 미국인에게 '불가능'은
금기어다. 부정적인 자세는 사상 범죄로까지 여겨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후로 병적인 낙관주의가 이처럼 팽배했던 때가 없었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이 파우스트적 믿음을 희망이라는 미덕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같은 믿음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신념의 형성에 대한 주의주의적(voluntarism)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간의 믿음을 계속해서 이른바 의지의 행위로
잘못 해석하게 될 것이다. (179-80)
☞ 이 부분도 그렇지만, 이글턴의 미국 비판 부분은 특히 웃기는 구절들이 많았음.
『마의 산』의 등장인물 중 누가 제일 디치킨스의 마음에 들었을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그러나 소설 자체는 인물에 대한
판정에서 좀 더 미묘하다. (중략) 나프타가 병적으로 죽음과 사랑에 빠졌다면, 세템브리니의 낙관적인 인본주의는 죽음을 억압하면서
번성한다. 건강과 문명을 예찬하는 세템브리니는 질병과 타락을 생각만 해도 끔찍해하며, 그런 상태를 지켜보는 일은 더더욱 못
견딘다. 인간다움에는 본디 병듦이 따른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사악함과 탈선은 인간 조건으로부터의 비합리적인 일탈인 동시에 인간 조건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삶 속의 죽음' 즉 삶과 죽음의 얽힘에는 나프타의 방식도 아니고 세템브리니의
방식도 아닌 또 다른 유형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없이 연약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인식하고 그런 인간다움을
겸허하게, 조금의 오만도 없이 인정하는 데 있다. 이 같은 비극적 인본주의는 세템브리니와 달리 죽음의 파괴성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나프타와도 달리 죽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를 거부한다. 죽음의 필연성에 복종할 때만 우리는 충만하게 살 수 있다. (2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