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노래
1집과 2집 전체를 놓고 비교한다면, 2집이 더 좋다고 하는 마을 주민들의 중론에 나 역시 동의한다. 2집은 각각의 곡들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좀더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곡의 수준(?)이 좀더 일관되게 좋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2집에서는 소위
'튄다'는, 달리 말해, 독보적으로 좋은 곡이 별로 없다면 없다. '열두 시 반' 같은 곡은 이십 대 후반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불안이나 막막함, 슬픔 같은 것이 풋풋하게 표현되어 있어 좋지만 --전에 브로콜리 2집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도 이야기했듯--
(밤) '열두 시 반'에서 시작해 (새벽) '다섯 시 반'으로 매듭지어지는 2집 전체의 정서적 시간의 맥락 안에서 들을 때 '더'
좋기도 하고, 더 납득이 가기도 한다. 반면 1집은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을 확 끌어당겼던 한두 곡에 대한 애정이 강해서,
다른 곡들이 전체적으로 좀 '떨어진'다 싶어도 그 곡들에 대한 애정이 쉽사리 식지는 않는다.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보편적인 노래'다.
CCM 같다는 의견도 좀 있었고, 막상 그 얘길 듣고 보니 멜로디에 다소 그런 느낌이 없진 않지만, 나는 '브로콜리
너마저'를 생각하면 '보편적인 노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꼭 그들의 대표곡이란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들으면 어딘지
저릿한 그 느낌 때문에 이 곡은 항상 좋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특정한'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과 이별하게 되는 과정이란 의미에서 항상
'특별한' 것임에도, 이 노래 속 화자는 도리어 '보편적인 노래'를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 제목이나 노래 전체에서 지배적인 가사말과는 상반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노래 속에 담겨 있고, 그래서 이 곡은 더 슬프다.
'함께 한 시간도 마음도
장소도 기억나지 않는' '보편적인 노래'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기실 의지로도 억누를 수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 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라든가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라는 말들 속에, 정말 태연하고 의연하게 보편적인 노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헤어지고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 하나의 사랑이 끝난 뒤에 '특정한' 상대로서의 자신의 기억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어 그를 괴롭히지
않고, 상대가 자신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기를 애써 바래보는 노래 속 화자의 힘겨운 몸부림이 보이고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저 과잉해석에 불과한 걸 수도 있겠지만-
앵콜요청금지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들 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감성에까지 쉽게(?) 다가간 곡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여기저기서 많이 듣게 되어 질리기도 쉬울 수 있지만, 나에게 이 '뻔한' 곡은 여전히 브로콜리의 최고 명곡 중 하나다. 재능있는
음악가나 배우의 재능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면서도, 막상 그 사람이 '너무 대중적인' 대상이 되고 나면 뭔가 도둑맞은 것처럼
안타까운 기분도 없진 않지만, 이 곡만큼은 아무리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게 되더라도, 그렇게 대중적인 사랑을 얻게 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계피의 밴드 탈퇴 이후로는 --짐작밖에 해 볼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라이브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곡이
되었지만, 공연장에서 이 곡에 대한 앵콜 요청을 할 때마다 곡의 제목과 그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끝나버린 사랑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는 가사에서 느꼈던 신선한 매력은 언제 들어도 좋다. 물론 '신선하'다고
해서 이 곡에 행복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 깃들었다는 건 아니다.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 같은 곡을 들었을 때의
신선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잔인할 정도로 건조한 가사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사랑 앞에 선 사람의 회한, 그리고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실은, 상대가 마음을 돌리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느꼈을 화자의 아픔이 정직하게 담겨있다는 그런 느낌.
잔인한 사월
애초에 단 두 곡밖에 들어있지 않은 데모 앨범이긴 하지만 --엄밀히는 세 곡이지만, 한 곡은 동일한 수록곡에 대한 연주곡이니까--
'잔인한 사월' 앨범은 두 곡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좋아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앨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앨범. 밴드를 나름대로는 유명세에 올려놓았던 보컬 계피가 밴드를 떠난 뒤에 나왔던 첫번째 앨범이라, 과연 계피 없는
브로콜리도 괜찮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접한 측면도 없진 않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내준 앨범이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잔인한 사월'은 사실 곡의 내용 혹은 소재의 측면에서는 2집 앨범 '졸업'과 일맥상통하지만, '졸업'이 그 곡의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촌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일부 가사 때문에 다소 거부감이 있었다면, 이 곡은 좀더 보편적이면서도
은유적이고, 그러면서도 소박한 가사에서 느껴지는 방황과 상실의 감정이 더 서정적이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내 마음 속에서 '보편적인
노래'와 각축을 벌이긴 하는데, 브로콜리 너마저의 모든 곡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을 수도 있을 정도.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계피의 밴드 탈퇴 이후에 나온 '잔인한 사월' 앨범에 이 곡이 실렸다는 점을 다소 지나치게 '전기적 (biographical)'으로
해석한 듯한 어떤 블로그의 포스팅에서, 이 곡이 그녀와 밴드의 결별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을 내놓은 걸 본 기억도 있지만, 뭐 굳이 그런 특정 '사건'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노래는 항상 소통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 문제로 인해
상처받거나 고민에 빠지는 사람에겐 참으로 절실한 노래다. '나의 말들은 자꾸 줄거나 또 다시 늘어나'라는 평범하지만 기발한
표현이 특히 공감이 가는.
변두리 소년, 소녀
이미 네 곡을 고르고 난 뒤라 이제 딱 한 곡밖에 더 고를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마지막 곡은 데뷔작품에서 특별히 성공을 거둔 감독이나 배우, 뮤지션, 작가 등이 종종 겪는 '2편/2집 징크스(Sophomore Jinx)'를 깨고 브로콜리의 저력(왠지 국가경쟁력 이런 거 연상시키는 어휘라 이 표현 진짜 싫어하긴 하지만...^^;)을 다시금 확인시켜
줬던 명반, 나의 2010 베스트 앨범에도 꼽혔던 브로콜리 너마저의 2집 '졸업'에서 심사숙고 끝에 고른 '변두리 소년, 소녀'다. 이 음반은 앞서도 말했지만, 앨범
수록곡 전체가 (한두 곡 정도를 제외하고는) 고르게 좋은 명반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한두 곡이 유독 튀기보단, 2집은
'2집'으로 뭉뚱그려 듣거나 말할 수밖에 없는 점도 있는 듯. 기승전결을 갖춰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까지 하면 억지스럽겠지만,
어쨌든 앨범이 일정한 서사성을 갖추고 있는 점 때문에도 그렇고.
이를테면, 류지의 꾸밈없이 풋풋한 음성이 처음 흘러나오면서, 이 앨범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솟아나게 했던, '열두 시
반'은 무척 좋은 곡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의, 같은 목적(지)을 향해 가는 삶 속에 몸을 맡겼다가 막상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불쑥 내리고 길을 잃은
청춘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눅눅한 버스'를 타고 졸다가 돌아갈 버스마저 끊겨버린 새벽에 낯선 정류장에 내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채 지치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밤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으로 그려낸 단순한 가사가, 마치 아무런 채색도 곁들이지 않고 연필 한
자루 들고 소박하게 소묘를 한 듯한 그 장면이, 유난히 와 닿는다. 곡 마지막의 노이즈 효과가 빚어낸 불안한 엔딩까지도
곡에서 전달하고
싶은 정서를 충실하게 담아낸 듯했고. 그렇지만 앨범 전체에 대한 인트로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서, 독립적으로 딱 이 곡,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허전(?)한 느낌 같은 게 있다.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변두리 소년, 소녀'―'커뮤니케이션의 이해'―'울지 마'로 죽 이어지는 일련의
곡들은 키드니 말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모두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런 만큼 뭔가 한 곡을 딱 떼어내기가
어렵다는 느낌도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는 데모 앨범에서 좋은 곡으로 이미 뽑았다는 사실? ㅋ)
그래도 굳이 골라보자면 '변두리 소년, 소녀'. 브로콜리의 노래가 전반적으로 소외계층(?)의 정서, 루저 감성을 담아내는 곡들이
원래도 지배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2집은 특히 더 그런 측면이 강한데, 그 중에서도 이 곡은 제목에서부터 그걸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은유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좋은 곡이라 하겠다. 그리고 어쿠스틱하고 서정적인 선율로부터 강렬한 기타 연주로 들어가는 도입부와, 무엇보다도 세상 속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이질적인 '변두리 소년, 소녀'라는 이미지를,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다 밀려난 존재로 그렸다기보다, 날개가 있어 언젠간 날아갈 이들인데 마치 잠시 이 세상에 몸을 가탁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독특한 가사가 좋다. 마치 영화 '아담'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아담을 어린 왕자에 비유했던 도입부의 느낌을 상기시킨다. ('아담' 리뷰)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다섯 곡 안에 꼽지 못한 곡들은 EP와 1집에 수록된 '안녕'과 2집의 '울지 마'. 난 이상하게도 잘 만나고 사랑하는 것에 관한 노래나 이야기보다는 좋은 이별, 잘 헤어지는 법에 관한 이야기에 유독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토이 스토리 3'를 좋아했던 맥락도 그렇고, 미선이 앨범에서 '시간'이라는 곡에 마음이 갔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안녕'이란 곡도 그런 점에서 좋은 곡. 노래의 감정과는 상반되게 경쾌한 피아노와 드럼 연주로 들어가는 도입부가 재미있기도 하고, 사실 노래라기보단 마음 속의 독백 같기도, 또는 헤어진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혹은 쪽지 같기도 한 가사도 그렇고. '울지 마'의 경우는 그와는 정반대로 연주와 음색이 진지해서 좋은 곡. 그런데 '울지 마'는 가끔은 너무 늘어지고 처량맞아서, '안녕'은 그 곡을 좋아하게 만든 경쾌함이 때론 경박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이 곡들에 대한 애정에는 다소 기복이 있다. 그래서 결국 5곡엔 꼽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듯.
그리고 마지막 보너스(? 뭐 이런 불쾌한 보너스가...ㅋ)로 싫어하는/별로 안 좋아하는 곡을 언급하자면, 브로콜리 노래 중에서 제일 안 좋아하는 곡일 뿐만 아니라, 들을 때마다
'대체 이 노랜 뭥미?' 싶은 '청춘열차'. 이건 사실 브로콜리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마냥, 완전 싫은 곡. 그 외에 가사가
짠해서 지다니나 노리나니는 좋아하는 것 같은 '할머니'는 도입부는 꽤 좋아하는데도, 어색한 사투리로 그 나레이션인지 랩인지를 하는
대목에서 매번 실소를 금할 길이 없어서 나로선 도저히 들을 수 없는 곡. 이 곡의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땐, 난 차라리 이 곡과
동일한 소재에다 아주아주 흡사한 정서를 담고 있는 루시드 폴의 '할머니의 마음'을 듣는 편이 훨씬 더 낫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