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만나 술을 한 잔 하고 집 근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했지만, 집 앞으로 가는 마을버스 한 대가 이미 지나가 버리는 것을 눈앞에서 놓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이폰 배터리가 다 돼 버려서 집 앞으로 가는 (일반)버스나 마을버스의 막차가 끊겼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을버스를 좀 기다리다가 그래도 일반 버스가 좀 더 늦게까지 다니지 않을까 싶어서 마을버스 정류장보다 몇 미터 더 앞에 있는 일반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버스를 기다리려는 찰나- 갑자기 양복 입은 아저씨/젊은이 한 명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양복차림이란 점을 빼고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어리다면 어렸을까 싶지만, 어쨌든 양복차림이라 아저씨스럽긴 했다.) 그러더니 "제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요."라고 말한다. 내 마음 속에선 '?????????? 뭘?????????'이라는 의문이 떠돌았다. 행여나 버스 줄이 있었는데 내가 새치기를 했나 하고 봤지만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잠깐 비를 피하느라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곳 마을버스와 버스 정류장 사이에 비가림막이 있는 정류장 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나 보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이 타려던 택시를 가로채는 상황도 아니었고, 엄연히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에 와서 서 있던 나는 "버스 기다리고 있는 건데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 "아니요."라고 말한다. '엥?????? 이건 또 뭥미? 내가 버스를 기다린다는데 자기가 뭐가 아니란 거야??????' 그래도 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는데, 이 아저씨 또 "아니요."라고 대꾸한다. 자기가 뭔데 내가 한 말에 멋대로 '아니요'라고 하는가 싶어서 한편으로 어이가 없어 하고 있는데, 이 사람 그제사 주섬주섬 귀에서 이어폰을 뺀다.
자기가 먼저 말을 하겠다고 온 인간이 귀에 있던 이어폰도 안 빼고 자기가 할 말만 하고,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아니요."만 연발하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버스 기다린다구요."라면서 내 옆의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우산으로 가리키니, 그제서야 '아-'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그래놓고 한 마디 말 --물론 여기서 한 마디 말이란 *사과*의 말을 포함한 것을 의미하지만, 정말 '한 마디' 말이다--도 없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버리는 거다. 우어 황당해.
가버리는 뒤통수를 보며 어이없어 하다 보니, '니 할 말 하면 다냐? 사과하고 가.'라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벙쪄 있었다. 무슨 이런 어처구니 없는 커뮤니케이션이 다 있어. 자기가 타려던 택시를 내가 가로채고 먼저 새치기 한 것도 아닌데, 버스 정류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제대로 안 한 채, 그러고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도 빼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하는 이따위 커뮤니케이션에 *기습*을 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당했다는 게 정말 억울할 따름이었지만, 그런들 어쩌랴. 어쨌든 다 늦은 밤에 무방비상태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이가 없다, 정말.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항상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 있는 바보스런 내가 가장 어이없고 억울한 요즘이다. 에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