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동상 김병만 선생 예찬
아이스쇼와 피겨스케이팅 얘기가 나왔으니 내친 김에 빙상의 달인 동상 김병만 선생 얘기까지- ㅋㅋ
오디션 또는 경연 프로그램의 '범람'이라는 표현조차도 오히려 미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공중파와 케이블을 막론하고 TV가 온통 경연 프로그램 투성이인 시절이다. 그래서 '김연아의 키스&크라이' 방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사실 분노? 짜증? 같은 감정이 먼저 일었다. 김연아마저 그런 예능 프로로 시청률 올리려는 데 써먹으려는 건가 싶어서. 사실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도 방송사 자체에서야 그런 목적이 없을 수 없었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위 연예인들이나 김연아에 대해서는 또 한번 감탄한 점이 없지 않다. 심지어 출연 연예인들 가운데 비호감이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고 일말의 호감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 게다가 피겨의 저변 확대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프로그램에 임했던 김연아는 정말 참가자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보이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피겨'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깊은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재)확인할 수 있어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참가자 가운데 내가 꾸준히 응원했던 김병만은 '달인' 코너에서 이미 그 근성 같은 걸 보고 감탄한 이후로 사실 가장 좋아하는 개그맨들 중 하나이긴 했었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스케이트를 30대 후반(?)의 나이에 배워서 어느 수준까지 갈 수 있으랴하는 회의가 들어서 내심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번째 경연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에게 '키스&크라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매주 김병만의 도전과 변신을 보는 의미가 가장 컸다. 이 프로그램은 개인 경연에서 매겨진 순위를 바탕으로 10명의 출연자들이 10명의 전문 스케이터들 중에서 자신의 파트너를 선택해서 일종의 아이스댄스/페어스케이트를 연기해 매주 경연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로 김병만은 이수경이라는 과거의 여자 싱글 선수를 파트너로 택했다.
그가 첫번째 주에 보여준 것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단순히 키가 작달막하다고 해서 무조건 어울린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부상 때문에 발목이 붓고 평발이라 스케이트를 신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럽기까지 한 그가 눈물을 삼켜가며 보여준 경연1주차의 희극인 찰리 채플린 연기는 다른 참가자들과는 격이 달랐다. 다른 이들이 여전히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었다면, 그는 완전히 그 역할에 이입되어 찰리 채플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도전에 대해 모든 심사위원들이 첫 주에 유일하게 10점 만점에 9점대 점수를 주며 답례했다. 어쩌면 그의 이런 성실성과 노력이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좀 더 노력해야 할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나,라고 --내 멋대로-- 추측해본다.
그것이 이유나 동기가 됐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모든 참가자들, f(x)의 크리스탈,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손담비 등의 연예인들은 물론,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규혁까지도 엄청난 성실성과 근성을 보여주었고, 실수도 있고 어설픈 면도 있긴 했지만, 매주 성장해나가면서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흐뭇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비록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음악활동은 아니지만, 그런 연예인들이 아마도 지금처럼 인기를 누리는 그 자리에 가기까지 쏟아부은 노력을 그 경연에 참가하는 태도를 통해 엿볼 수 있기도 했다. 그런 면모를 보니 심지어 그들이 의외로 순박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규혁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김연아처럼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운동선수가 아닌 한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별로 없어서 외모만을 보고 그저 무뚝뚝하고 과묵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정말 익살스럽고 스스럼없는 성격인 듯한 면모를 많이 보여주어 본의 아니게 프로그램의 유머를 담당했던 것 같다. '스케이트 잘 타는 개그맨 같다'고 했던 신동엽의 표현이 딱 들어맞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김병만-이수경, 이규혁-최선영('들국화' 베이시스트 최성원의 딸이라고) 팀이 유난히 맘에 들어서, 아예 커플로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할 때도 있었고, 둘 중 한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김병만을 가장 응원했지만, 김병만이 안 된다면 이규혁이었으면 좋겠다고.) 결국 우승을 한 크리스탈이 갖가지 자세의 리프트에서 보여준 유연성에도 놀랐고, 그걸 해내기까지 쏟아부었을 노력도 높이 사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김병만이 우승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뭐랄까, 내게 크리스탈의 연기는 감탄은 자아내지만 어딘지 감동이 없는데, 김병만의 연기는 익살스럽고 웃길 때조차 항상 마음 한켠을 짠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김병만이 마지막 경연을 위해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다섯 번의 경연으로 이제 김병만이 연기할 수 있는 소재는 고갈된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뭔가 화려하고 아름다우면서 진지한 연기를 하기엔 신체적 한계가 있다 보니 (160cm도 안 되다 보니 여성 파트너보다도 키가 작아서 아무래도 모양이 빠진다.), 귀엽거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어느 정도 지나면 결국 식상하고 쉽게 가려는 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달까. 그렇지만 정작 정면승부를 하기엔 여전히 취약하다는 인상이 없지 않아서, 캐릭터가 빠진 연기를 한다는 건 우승을 노린다면 잘못된(?) 선택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결과적으로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승부가 난 뒤에, 머라이어 캐리의 'Hero'에 맞춰 연기한 김병만의 연기와 그 배경으로 들어갔던 그간의 연기장면이나 연습 사진을 보니 그 작품의 특별한 의미를 음미할 수 있었다. 자칫 유치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 '당신 안에 영웅을 찾을 수 있다'는 이 노래는, 그러나 매우 진솔하다. 사람에게 그런 면모가 있다는 것, 사람들의 삶에서 그런 희망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내가 아무리 감상주의를 꺼려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노래가 지닌 그 진솔함의 힘은 그의 연습 과정, 더 넓은 의미에서는 그의 삶의 과정과 잘 어우러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회의적인 눈초리, 스스로도 자신하기 힘든 불투명한 결과와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과정 안에 자신이 철저히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가 해낸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왔던 자신의 모든 것을 그는 마지막 작품에 녹여서 보여주었다. 다른 팀들이 또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 그는 '키스&크라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걸어온 자신의 여정 자체를 표현하면서 피겨라는 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하나의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작품을 택했던 것 같다. 사실 경연을 마친 직후에는 실수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그가 울음을 삼키면서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헌데 평가가 모두 끝난 뒤에 실패했던 리프트를 다시 보여드릴까요? 하면서 기술을 편안하게 성공시키고는, 일종의 골세레모니마냥 익살스런 동작을 해보임으로써 김연아와 데이비드 윌슨까지 따라하게 만들 정도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걸 보고 그에게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저것이 천상 희극인의 숙명인가 싶어 조금 안쓰럽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그가 실수 없이 우승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결국 경연 당일 아침 '오늘은 실수하는 팀에겐 우승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고 점쳤던 그의 인터뷰 멘트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견이 되어 버린 것도 같지만, 우승하지 않았어도 그의 여정 자체에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그 여정을 즐겁게 기억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즐거운 기억을 선사해준 그에게 감사한다. 게다가 그가 귀여운(?) 연기를 할 때마다 손뼉까지 쳐가며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귀여워! 귀여워!'를 연발하거나, 그가 고통을 참아가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함께 눈물까지 흘리던 연아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그가 선사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더더욱. :D
뭐, 아직 다음주에 경연이 끝난 뒤 특별방송을 마지막회로 남겨두고 있긴 해서, 뭔가 특별한 공연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된다. 경연장에 한번쯤 가서 김연아를 가까운 곳에서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제 경연이 끝나버려 그럴 수 없다는 점은 마지막까지 아쉽다. (이벤트 경품으로 티셔츠와 스티커보다 그 기회를 받았다면 더 기뻤을 듯.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