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세상(인생)에 항상적인 것은 무상함밖에 없다'는 일종의 불교적 명제를 영어로 표현할 때 종종 "The only constant in life is change."라고 표현을 사용한다. 헌데 내가 이 말을 생각하면서 내 삶에서 항상적인 것을 떠올려보면, 매해 가을이면 어김없이 가는 '이병우 콘서트'이다. (철학적인 명제를 너무 통속적으로 뒤틀어버린 거 같지만 ㅋ) 나란 사람은 무엇 하나 제대로 꾸준히 하는 것 없는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병우 콘서트만큼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맘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갔던 것 같다. 다만 그 안에서 올해에 생긴 미묘한 변화라고 한다면 --물론 그간은 단 하루밖에 공연을 안 한 적도 있어서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이틀의 공연을 모두 보러 갔다는 것. 그리고 역시 그러길 잘 했다. 공연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날 관객과의 호흡, 그날 공연자의 컨디션, 분위기 등에 따라 같은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해도, 다른 것이 되기 마련인데, 이틀간의 공연은 게스트도 달랐지만, 음악도 분위기도 달랐다.


총평부터 먼저 하자면 기타 솔로 곡들 위주로 구성을 한 2부가 단연 더 좋았다. 특히 피날레로 연주한 '항해'와 준비된 앵콜이라 할 수 있는 '자전거'는 (일렉트릭) 드럼, 베이스, 건반, 기타, 그리고 퍼커션이 함께 눈을 맞춰가며 연주한, 아마도 '이병우 밴드'라 지칭할 '밴드'의 공연이라 더욱 짜릿했던 것 같다. 머리카락이 좀 있었으면 머리칼 좀 신나게 날렸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표현하면서도, 머리칼 한 올 없는 반짝이는 머리로 흥에 겨워 신나게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이병우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둘째날은 심지어 너무도 흥에 겨워 마지막 곡 연주하다가 바닥에 있는 줄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는! 그런 뒤에 겸연쩍게 웃던 모습 정말 귀여웠다. 게스트로 나온 정재형 자신이 농담으로 표현한 것처럼 '정재형 나부랭이'도 대세가 되니 나도 텔레비전으로 먹고 살 수도 있는 건가,라는 기대라면 기대감으로 4주 동안 스케치북에 출연했으나, 30분의 멘트가 30초로 편집되는 현실의 벽을 절감하고, 역시 기타를 쳐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그는 기타를 메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때 가장 멋지고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이번 공연은 더더욱 각별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올해 이끼 낀 벽돌 계단에 미끄러져 넘어져서 왼손을 다쳤었다고 한다. 넘어지는 순간 별이 보이기도 했고, 실제로 손을 다쳐 이번 공연 이전에 잡아놓았던 공연은 심지어 취소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하니 상황이 꽤 심각했던 것 같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인생이란 어느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구나,라는 생각에, 컴퓨터에 있던 좋아하는 '여배우 폴더'를 삭제하기까지 했다는 농담에 웃긴 했지만 --그동안 음악 잘 해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리하기 위해 컴퓨터를 열었다가 그런 폴더를 발견하면 너무 사람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나-- 그가 더 이상 기타를 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슬프다. 그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은, 공연장에 들어서기 몇 시간 전부터 두근거리건만.


첫날(12일) 공연의 게스트는 정재형과 루시드 폴이었다. 루시드 폴에 대해서는 유희열을 통해 '형이랑 똑같이 노래하는 애가 있어요.'라는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며 소개를 했다. 자신이 '어떤 날' 시절 노래를 할 때, 음정과 박자가 불안한 사람들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자신의 별명인 '나중에'라는 말처럼 그런 노래를 할 기회를 계속 미뤄오다가 결국 그런 음악으로 명성을 날릴(?) 기회를 후배 루시드 폴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 같다고 말하며, 그가 작년 공연에서 직접 불렀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루시드 폴에게 청해 들었다. 뭐, 그의 말대로 비슷하긴 했지만, 역시 이병우 음성으로 듣고 싶었다. 난 오히려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하고 노래한 정재형의 'Running'이 더 좋더라는. 이병우는 그 대신, 그동안 앵콜곡으로 부르기 위해 '나중에' 곡으로 준비해 놨다가 정작 공연 때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던 노래라고 하는 '우린 살아야 하고'라는 곡을, 이번엔 미루지 않기 위해 공연 중간에 '앵콜곡'으로 직접 불러 주었다.

둘째날(13일) 게스트는 성시경이었는데, 이병우가 듣고 눈물이 날 뻔했다는 성시경 신보의 '처음'이라는 노래를 먼저 불러주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도 그렇고, 정말 좋더라는. 요즘 발라드 가수들은 일차적으로는 다 우는 소리 내는 '소몰이 창법'이거나, 그렇지 않고 맑은 음색으로 노래하면 너무 찬송가 풍의 노래인 경우가 많은데, 성시경의 발라드는 미성이면서도 어느 정도 건조한 느낌이 들어 그 어느 쪽과도 달라서 좋다. 대신 본인 노래들 속에서는 그 노래가 다 그 노래 같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ㅋ 그 다음엔 이병우가 90년에 참여해 전곡을 작곡했던 양희은 앨범의 노래 가운데 '그리운 친구에게'를 불렀다. 본인의 곡인 '처음'도 그렇고, 이 '그리운 친구에게'라는 노래도 그렇고, 이날 성시경이 부른 노래들은 전부 어떤 관계가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사람을 추억하는 느낌이 많이 나서 아련하더라는. 암튼 둘째날 성시경의 노래가 무척 좋아서, 이번 새 앨범 사고 싶어졌다. ㅎ


나에게 있어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이병우가 2부에 들어와 무대에 불이 켜진 뒤 아무 말 없이, 그리고 다른 반주 하나 없이 '기타발전소'-'우주'(신곡)-'새'를 연달아 연주한 시퀀스였다. 기타와 자신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고요한 표정으로 기타를 감싸안고, 그렇게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모습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병우의 모습이다. 나에게 평생 단 한 곡의 음악만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떤 곡을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난 아마도 이병우의 '새'를 택할 것 같다. 그 곡에는 바람이 뺨에 부딪는 감촉과 공기를 가르는 새의 날개짓이, 그리하여 무엇보다 자유로움과 설렘이 느껴진다.

그 외에 이번 공연에서 특이했던 것은 포르투갈어로 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선보인 것. 이 노래는 가사가 붙은 이병우 노래 중 그나마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서 그런지 그간의 공연에서 매번 다른 사람의 음성을 통해 여러 차례 선보인 적이 있었다. 가장 초기에는 '박윤'이라는 퍼커션 주자의 기교없이 맑은 음색으로 불러준 것에 감동했었고, 몇 년 전에는 제대한 '조성모'가 마치 카스트라토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듯한 미성으로 불러 주어 조성모의 노래 실력을 재발견한 경험이 있었다. 올해는 이번 공연에 동참한 브라질 출신 퍼커션 주자 ...가 (지금 이름을 찾을 수가 없네.) 포르투갈 어로 직접 번안해서 불러주었다. 파바로티를 연상시키는 듯한 덩치에 까무잡잡한 피부, 하얀 판초 같은 상의를 입고 성근 레게 파마 같은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나온 이 분의 맑고도 구슬픈 음성으로 들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내 마음/내 사랑'이라는 의미로 'o meu coração'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 같다.)은 참으로 색다르고도 아렸다. 역시 명곡은 다른 법인가. 이미 영어포함 3개 국어로 번안돼서 불리워졌다는데 다른 언어로 부른 건 어떨지 궁금하다.

첫날과 둘째날 공연의 차이는 아무래도 첫날 공연은 본의 아니게 리허설 같은 부분들이 있었다는 점인 것 같다. 이번 공연에도 영화 음악의 경우 그 곡이 삽입된 영화 장면을 배경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마리이야기의 삽입곡을 연주할 때, 첫날은 긴장을 한 탓인지 연주가 빨라진 바람에 새가 날아가는 장면에 대한 곡으로 연주한 음악이 새들이 나오는 장면에 미처 도달하기 전에 끝나버렸다고, 나중에 설명을 해주어서 웃었더라는. 그 외에도 '장화 홍련'의 삽입곡이었던 '자장가/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이번에 카르티에의 새 향수 전세계 TV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서 그 광고 영상도 더불어 보여주었는데, 첫날은 광고 영상 전체를 보여주지 않았는데, 둘째날은 광고 멘트까지 들어간 전체 영상을 보여주었다. 대신 첫째날 공연의 특별한 점이라고 하면 '우주'라고 하는 신곡을 그야말로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는 것. 아마도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가고 싶어하는 심리란 그런 것 때문이겠지. 이처럼 '처음'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거나, 혹은 마지막으로 '완성'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서로 다른 장점 때문.

그리고 이틀 공연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의 차이라고 한다면, 첫날은 정말 무대 바로 턱밑에 있는 S석 첫번째 줄에서, 둘째날은 무대가 전체적으로 조망되는 R석 중에서 무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공연을 본 것이다. 당연히 더 비싸고 아마도 음향상의 조건으로도 더 좋았을 R석이 좋았다고 말해야 할 테지만, 솔직히 그의 손끝이 움직이는 것이 코앞에서 보이고 간간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던 맨앞줄 자리가 더 좋았다. ㅋㅋ

인터미션까지 포함해서 2시간 10분 정도일 거라고 했던 공연은 이틀 내내 거의 3시간을 꽉 채웠다. 앵콜 곡을 미리 연주해서 그랬는지, 아쉽게도 앵콜 곡을 전혀 듣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이틀째 공연에서 '앵콜곡'으로 들려드리겠다고 한 '자전거'는 사실 프로그램에 이미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앵콜곡이라고 할 수 없을 듯.)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번 공연은 유난히 포스터가 인색했던 듯. 작년 세종문화회관 공연에는 공연장 내에 포스터가 많아서 나중에 떼 올 수가 있었는데, 이번엔 공연장 내에 포스터가 두어 장 정도밖에 없더니만, 심지어 그것마저도 공연이 끝난 뒤에 나가니 이미 다른 공연 포스터로 교체가 되어 있더라는. 2부에서 꼈던 빨간테 안경을 쓰고 웃고 있는 옆모습을 찍은 이번 포스터는 유난히 마음에 들었었는데, 여러 모로 아쉽다. 자신이 최근 2년 동안 음악적으로나 패션으로나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뽀로로이기 때문에 택한 안경이라고 설명한 빨간 뿔테 안경 ㅋㅋㅋ 정녕 특이하고 예뻤는데-

아. 그런데 이 안경과 관련해서도 둘째날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첫날은 조용히 들어와서 노래와 연주만 했던 브라질 퍼커션 주자가 둘째날은 무대에 올라와 이병우에게 말을 걸었다. 빨간 뿔테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을 보고 "오늘 아주 멋진데- (You look good, man.)"라고 했던 것. 그랬더니 이병우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수줍은 미소를 띠고는 "나도 알아. (I know, man)"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무대 위 대화는

"그럼 나 좀 빌려줘도 돼?"                                                   "Can I borrow it?"
"물론이지."                                                                                     "Sure."
"그럼 10달러 줄게."                                                 "I'll give you ten dollars."
"너무 많은데. 1달러만 줘도 돼."                         "That's too much. One dollar."
"그래."                                                                                             "OK."
"근데 (빌려준다는 거) 농담이야."                        "Actually, I was just kidding."
"어. (빌려달라던 거) 나도 농담이야."                                               "Me too."

라는 상당히 길고도 실없는 농담으로 이어졌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슬프고 진지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나왔는데 이런 대화 때문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자, 이병우가 "어... 슬픈 노래 불러야 되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돼서 어떡하죠."라며 역시나 수줍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는. 뭐, 그래도 다시 분위기를 가다듬고 차분한 연주와 노래를 이어갔다.

공연 중 멘트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이날 공연 멘트에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또 한 가지. 이병우가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계속 함께 해오고 있는 스트링 앙상블이 있는데 그 앙상블 이름이 '비움'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처음 음악작업을 한 뒤에 영화 크레딧에 오케스트라 이름을 넣을 때, 개개인 연주자 이름이 들어가기 전에 윗 부분에 공간을 좀 '비워' 달라는 의미로 '비움'이라고 적어서 보냈더니, 그게 나중에 영화 크레딧에 오케스트라 이름으로 버젓이(?) 들어갔더라는 것. 그래서 결국 그게 실제 이름이 되어 버렸다고 하니 정말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곡절로 이루어지고 채워지는 것 같다. ㅋㅋ


이번 공연은 넘어진 것 때문에 왼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곡 위주로 프로그램을 짰다고 했는데, 그래도 다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이 되어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해마다 그의 공연을 보러 갈 수 있는 것이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은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다. 이렇게 10월의 연례행사가 또 끝나고, 나는 다시 내년에 그를 만날 날을 기다린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