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눈뜬 장님

grey room 2012. 2. 3. 18:29

우린 얼마나 눈을 뜬 채로, 그렇지만 정작 눈을 감고 사는가.
어제 '로제타'를, 그리고 월요일에 '자전거 탄 소년'을 보고 
또 다시 마치 어설픈 관성처럼 그런 생각이 밀려왔다.
 
신산한 삶,이라는 말이 그저 관용어구에 불과한 것이 아닌
그런 삶들이 지금 내가 버젓이 눈을 뜨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여기저기 있을 것이 뻔한데,
나는 내 앞가림만 하기도 버겁다는 이유로
사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 영화, 그런 글을 볼 때 한 번쯤 뜨끔한 시늉을 하고는
또 그렇게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내 주변엔 장애인 인권운동에 동참하는 이들도,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이들도
그리고 환경문제나 동물의 권리,
혹은 제3세계의 어린이들의 인권을 위해
사소하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세계를 구원할 것도 아닌데,라는
시건방진 냉소주의는 좀 접고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믿고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위해
확실히 실천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즐겨듣는 팟캐스트 가운데 "The Moth"라는 것이 있다.
뉴욕을 기반으로 해서 1997년에 생긴 비영리 '스토리텔링' 단체인데,
그 진행방식은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연상하면 된다.
'The Moth' 이벤트가 예정된 날 한 가지 주제를 주면
그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대체로 10분 이내에 무대에 나와서 하면 되는데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무대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 중 선별된 것이
일주일에 한편씩 팟캐스트로 올라온다.

그 팟캐스트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
그날 무대의 진행자였던 사람이
현재 연극기획자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 관해 이야기를 해준 것이 기억난다.
(역시나 고유명사에 대단히 취약한 고로,
이름들은 모두 지워진 상태-_-;
찾아서 확인하자니 그것마저도 귀찮아서...)

이 친구는 지방에서 뉴욕으로 옮겨와
연극기획자로서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이나 열정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헌데 테레사 수녀님의 팬(?)이었던 이 친구가 우연히
테레사 수녀님이 UN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뉴욕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수녀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에 불타던 이 친구는
사실상 스토킹을 해서 수녀님이 묵는 숙소를 알아내고
숙소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다른 수녀님들을 비롯한 일행과 함께
이동을 위해 준비된 차량에 타려는 테레사 수녀님을 마침 보게 되었다.

수녀님에게 달려가 인사를 하고
자기가 수녀님과 수녀님이 하시는 일을 얼마나 동경하고 존경하는지,
그리고 반드시 인도에 가서 수녀님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수녀님은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제가 하는 일은, 그 일이 얼마나 '의미있는지'를 생각해서만은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오직 자신이 보살피는 이들과 단 한시도 떨어질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자신은 연극 기획을 하는데,
수녀님이 하는 일에 비하면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고 하자
수녀님은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엔 많은 종류의 '기아'가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엔 물론 '육체적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죠.
하지만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또한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살고 있는 이곳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와서 제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이들을 위해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을 열성껏 해주세요."


태어나서 수없이 들어왔던,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라는 말씀 중
나름대로 가장 공감이 가는, 혹은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어제 '로제타'를 보며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다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투신할 수 있는 인간인 걸까
라는 점이라 하겠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