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닌 종교가 존재할 수야 있으랴만, 사실 종교라는 '제도'에 대한 불신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발전된 형태의 종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부패의 징후들에 대한 거부감이라 해야 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숭고'라는 감정, 장엄한 대상 앞에서의 숙연함과 경외의 감정이 사라지진 않는다. '신과 인간'을 보면서 오랜만에 그런 감정이 환기되었다.
'신과 인간'은 1990년대 알제리 내전 당시 알제리의 작은 산골마을 티브히린(Tibhirine)에 위치한, 그에 걸맞게 자그마한 트래피스트회(Trappist) 수도원에서,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한 마을 사람들과 평화롭게 그리고 묵묵히 일상을 꾸려나가던 일곱 명의 수도사와 한 명의 의사가 겪었던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신에게 바쳐진 삶에 걸맞게 하루하루 수도사로서의 가장 기초적 임무인 기도와 미사를 충실히 해나가는 것과 더불어, 이 수도원의 수사들은 성경과 나란히 코란을 두고 함께 읽고 공부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에 대한 봉사를 병행해 간다.
이러한 그들의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한편으로는 단조로운-- 일상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그에 대한 정부군의 무자비한 응징으로 내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였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고요한 수도원에 들이닥쳐 의사와 약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지나가던 거리에서 사람들이 반군이나 정부군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오로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삶을 지탱해왔던 수도사들은 이곳에서의 삶을 지속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그들 사이에서는 물론, 스스로의 내면에서도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길을 택한 이들에게 마지막 시련이 닥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인 동시에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실화의 줄거리라 하겠다.
영화는 장중하고도 맑은 음성으로 새벽 미사를 드리는 수사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의 생활, 그들의 삶에 드리우는 알제리 내전의 어두운 그림자들 사이사이에서도 이들의 이 숭고한 일상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며,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수도원에 들이닥쳐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밤, 그들은 흔들림 없이 예정대로 예수의 탄생에 감사드리는 미사를 행한다. (영화 속 대사 그대로는 아니나) 영화 속 크리스티앙 신부의 말처럼 그들이 선택한 삶은 바로 그것이며, 그러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 곧 그들이 살아가는 소명일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 수도사가 된 것이지, 죽으려고 된 것이 아니'라고, 도대체 이렇게 해서 순교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며 갈등하던 구성원들도, 수도원에 남을 결심을 한다.
수도사들의 성가나 기도 장면을 제외하고는 별 음악적 요소나 장치도 없이 진행되어,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면이 별로 없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마지막 '백조의 호수'는 빼고...) 그러나 소박하고 단순한 일상을 꾸리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눈앞에 닥친 죽음의 위협 앞에서 거짓없이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고 번민하는 모습에서, 그런 숭고한 삶의 경지를 경험해본 적조차 없는 나조차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나라면 어떻게 저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까지.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고요하고 장엄한 숭고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압도될 수밖에 없다. 그 여운이 여전히 마음을 고요하게 울린다.
영화를 보고 와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에 나레이션처럼 낭독된 크리스티앙의 독백은 그가 그 사건을 겪기 2년 전에 써놓은 편지라는 사실이었다. 직접 그 사건, 죽음을 경험하기도 전에 일종의 예시(豫示)를 경험했던 그는 미래의 자신의 살해자들을 위한 용서의 편지를 쓰고 그것을 봉인해 프랑스에 계신 어머니에게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뒤에야 열어본 그 편지글이 일부 각색된 것이 그 영화 속 나레이션이었다. 영화 속 나레이션의 불어 원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영문번역본밖에 없었고, 프랑스어 편지의 일부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난 어차피 불어를 해석할 순 없으니, 아래에는 마지막 나레이션에 해당하는 영어 번역문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 번역을 싣는다.
어느 날 --그것은 오늘일 수도 있겠지요-- 내가 이곳의 이방인들을 모두 삼켜버리는 테러리즘의 희생양이 된다면, 나는 나의 공동체, 나의 교회, 나의 가족들이 부디 내 삶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바쳐진 것임을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이승을 이렇게 잔혹하게 떠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유일한 주관자께서는 이미 경험하셨던 것임을. 그리고 나의 죽음이 무관심 속에 잊혀져간 다른 모든 잔인한 죽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나는 이제, 나 역시도 이 세상에 만연한 악의 공모자이며, 그 악이 무차별하게 나를 덮쳐오리라는 사실을 알 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나는 그런 죽음을 결코 바라진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죽음으로 인해 비난받게 되는 것이 결코 원치 않습니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무비판적인 경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가 특정한 이슬람주의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 나라와 이슬람교는 좀 다릅니다. 그들은 육체와 영혼입니다.
나를 순진하다거나 이상주의적이라 말하던 이들에게, 나의 죽음이 아주 손쉽게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를 괴롭혀오던 번민과 호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에 맞추어 그의 이슬람의 자녀들을 함께 바라볼 수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내 생애 전체를 둘러싸고 관통하는 당신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어제와 오늘의 친구들은 물론,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도 모르는 채 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친구들까지도 포함해서. 그래요, 당신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고합니다. 당신들이 예견해준 작별 인사를.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천국의 행복한 도둑들로서. 우리들 모두의 신께서 원하신다면. 아멘. 인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