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락페스티벌에 가는 키드나 벨로, 지다니, 괘래니 같은 주민들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올해의 락페스티벌 참여?관람?은 나에게도 나름대로 의미가 남달랐다. 1일권으로 하루만 구경하고 오거나, 심지어 작년엔 보러 가고 싶은 밴드 없다고 공연은 보지도 않고 주민들의 숙소에 오로지 놀러(라 쓰고 술 먹으러,라고 읽어야겠지? ㅋ) 가기만 했던 나는 사실 '염불보다는 젯밥'형 락페 관객이었던 셈인데, 이번엔 3일권으로 지산에 다녀오고, 심지어 그 뒤에 펜타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사실 오랫동안 범생 기질이 다분했던 나에게 (비틀즈를 제외한 밴드들의) 락 음악이나 브릿팝은 사실 오랫동안 어렵거나 껄끄럽게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행여 듣게 되더라도, 아 시끄러워(-_-)라는 생각을 주로 했던. 그 여파가 더 컸던 것은 (물론 가장 결정적으로는 음악적 소양이 부족했던 탓이지만) 어쩌면, 역설적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영국에 살아서,였을 수도 있다. 어리고 고지식했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서구권에 가서 요란한 피어싱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을 한 모히칸 스타일이나 스킨헤드족들을 거리에서 보았을 땐 신선하다거나 멋있다기보단 그저 위협적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니 그들이 틀어놓거나 즐겨듣는 음악들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간다기보다, 가사조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더더욱 소음 이상으로는 들리지가 않았다.
그 시절에 생겼던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그런 이들이 들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음악은 접해보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락 음악 비슷하게 생겨 먹은 음악을 그나마 좀 듣게 되었던 것은, 우울하면서도 다소 건조한 사운드의 모던락이라든가 아일랜드 출신 가수들의 묘하게 슬프고 우울한 포크락을 접하게 되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키드니 같은 골수 락 팬이 좋아하는 밴드들의 음악은 거의 접해본 적 조차 없다. 심지어 밴드의 연주가 '시끄럽다'가 아니라 '강렬하다'라고 느끼게 된 것도 직접 공연장에 가서 음악을 듣게 되면서였던 듯. ㅋ 어쨌든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 올해 락페스티벌 이야기로-
1. 지산
7.27. (금) 검정치마 & Radiohead
올해 지산에서 본 밴드 공연 수로만 치면, 모든 주민들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은 공연을 보지 않았나 싶다. (괘래니가 마지막날 나보다 더 봤을지도 모르겠는데.) 첫날은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도착해서 공연장을 둘러보기 위해 땡볕에서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이미 탈진해서 숙소로 돌아가 내내 쉬다가, "검정치마"와 "Radiohead" 단 두 밴드의 공연만을 보았다.
"검정치마"는 사실 엄청 좋아하는 밴드라기보다는, 복고적인 느낌의 독특한 사운드가 듣고 싶을 때면 간혹 찾아서 듣게 되는 밴드이고 라이브로는 처음 접해 봤다. 워낙 라이브에 대한 혹평을 많이 접한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으나... 역시 별 임팩트는 없었다. 그린스테이지에서 이들의 공연이 끝난 뒤 빅탑스테이지로 이동. "엘비스 코스텔로와 임포스터즈"의 연주를 들으며 돗자리에서 "라디오헤드" 공연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즉, 시간을 때웠다. (코스텔로 옹 죄송- ㅋㅋ)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대의'의 측면에선 엘비스 코스텔로의 삶이 멋지긴 했지만, 공연엔 정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노년의 음성이 잘 어울리는 음악도 있을 테지만, 뭔가 그의 목소리와 그의 음악이 나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더라는.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라디오헤드". 사실상 올해 나는 물론이거니와 지산을 포함한 모든 락페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상 최악의 인파를 경험하게 했던 장본인인 이들. 허나 그럴 만했고, 그것을 감수하고도 그곳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게 했다. 전설이 허명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그들은 과연 전설이 전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게 했다. 난 물론 아무런 화려한 장치 없이 기타 하나만 메고 나와 목소리와 기타 선율로 무대와 관객들의 마음을 꽉 채우는 그런 공연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사람, 혹은 소수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자본과 인력과 에너지가 투여된 화려함의 극치가 정교하게 표현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의 힘으로 많은 돈을 의미있게 쓰는 일이란 참으로 멋질 수도 있구나,라고 수긍하게 된다. 라디오헤드의 무대는 나에게 그랬다.
물론 그 나름대로는 정예의 인력이었겠지만, 영상을 담당한 자신들의 기술인력까지 함께 대동해서 온 이들의 무대는, 그들의 연주에 걸맞는 것이면서, 시각적인 면에서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자신들의 단독공연도 아닌 락페스티벌에서 2시간이 넘게 공연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감동적이었는데, 매 노래를 성심성의껏 부르며 관객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이 전설의 밴드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락 팬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몽환적인 일렉트릭 사운드가 돋보이던 연주와 톰 요크의 열정적인 춤과 나이를 무색케 한 노래는 정녕 올해 지산에 간 이유로서 충분했다.
7.28. (토) 이이언, Owl City & James Blake
날이 더운 탓도 있었고 다들 전반적으로 듣고 싶었던 밴드가 없었던 둘째날. 모두들 저녁 끝 공연 두 개 정도나 보러 가겠다고 생각하고들 있었다. 나는 짜증이 복받치게 한 번역 알바를 오전 중에 끝마쳐 파일을 보낸 뒤, 마치 피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운 햇살의 오후에 "MOT"의 보컬이면서 최근에 솔로 앨범을 낸 이이언의 공연을 보러 혼자 나갔다. 가느다란 몸에 창백한 얼굴의 이이언. 마치 목소리 자체에 신디사이저의 기계음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에게서, 나는 마치 뱀파이어 같기도 하고 로보트 같기도 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뜨거운 태양 아래 서서, 그 순간 그 공간에 서 있는 것이 부조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뱀파이어 분위기를 풍기던 이이언의 음성과 노래는, 무심한 표정으로 우울의 밑바닥까지 침잠해 갔다. 그의 무대는 많은 말 없이 간결하게 진행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밑에 다닥다닥 붙어 소리를 질러대는 여성팬들에게 그는 '이거?'하는 듯한 표정을 살짝 짓더니 손에 들고있던 수건을 던져 주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니 키드니는 만약 샤형님 땀 닦은 수건을 준다면 자긴 받을 거 같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아무리 좋아하는 뮤지션이나 운동선수(라 쓰고, '연아'라 읽는다 ㅋ)여도 굳이 땀 닦은 수건을 받고 싶을지는...
그의 공연이 끝난 뒤 여차하면 다음 순서인 루시드폴까지도 볼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오전에 마쳐서 보낸 번역 작업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이이언 공연 직전에 의뢰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래서 얼추 공연이 끝나고 방에 들어가서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고 통화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방에 돌아가 전화를 받으니 내가 보낸 파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서 자신이 고치고 싶은 부분을 표시해서 파일을 다시 보내겠다고 하는 것.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는 금방 오는가 싶어서 방에 앉아 이메일을 기다리다 보니, 어느 새 루시드폴 공연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귀찮아져서 결국 그의 공연은 건너 뛰었다. 참... 옛날 같으면 절대 없었을 일인데 애정이 많이 식긴 식었다. ㅋ
우선 빅탑스테이지 근처에 돗자리를 깔고 이적의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다같이 치킨으로 저녁을 먹은 뒤, "아울 시티" 공연을 보기 위해 그린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아울 시티는 관객들의 반응에 엄청 감격하는 것이 느껴진 발랄하고 경쾌한 밴드였다. 뭔가 상큼하고 귀여운 느낌은 들었지만 그다지 깊이 있는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소 취약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의 공연이 끝난 뒤 제임스 블레이크의 무대가 펼쳐지는 빅탑스테이지로 이동. 빅탑스테이지 잔디밭에는 예전에 내가 지산에 왔던 그 어느 때보다 빽빽하게 돗자리들이 깔려 있었다. 약간 뒷쪽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그의 공연을 보는데, 외모는 정말 딱 내 스타일이었지만, 음악은 그 무대엔 어울리지 않아서였는지 음악엔 크게 몰입하지 못했다. 앞에 가서 집중해서 들으면 좀 나을까 싶어서 가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런 크기의 무대나 그런 분위기의 관객들에게 선보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분위기와 곡의 공연이었던 것 같다. 공연이 끝난 뒤 차라리 그린스테이지 헤드라이너였다면 이보다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과 그의 가느다란 외모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품고 숙소로 돌아왔다.
7.29. (일) 넬, Beady Eye, 장필순 & Stone Roses
사흘 중 가장 많은 공연을 보았던 날. 그리고 그만큼 다채로운 무대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넬"의 음악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라이브 무대를 접해본 적 없었던 나는 마지막날 넬의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내심 가보고 싶었다. 그들의 무대가 있는 시간이 너무 더운 시간대이긴 했지만, 그래도 결심을 굳히고 벨로, 지다니와 함께 그들의 무대를 보러 갔다. 최근 앨범에서 많은 곡들을 부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라이브 무대에 선 것이 워낙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 히트곡들 위주로 비교적 모든 앨범들에서 골고루 부르더라는. 뭐 그들의 노래를 두루두루 많이 좋아하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셋리스트였다. 그들 노래 중에서도 마이너한 곡에 속하는 탓에, 꼭 듣고 싶었던 '얼음산책'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외국 밴드나 가수의 공연을 갈 때는 --대미언 라이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벼락치기 예습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한국 밴드나 가수의 공연에 가는 매력은 역시 아는 노래가 많다 보니 노래를 맘껏 따라 부르며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랄까. 암튼 몇 년 전 펜타에서 좋지 않은 무대 매너를 보여준 이후로 키드는 넬에게 실망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이제 넬도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은 갖게 된 듯한 분위기...라는 건 나의 속단이려나? ㅋ 암튼 그랬다.
"오아시스" 공연에 이미 다녀온 적 있는 대부분 마을 주민들에게 "비디 아이"의 공연은 되려 익숙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리암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맨시티 유니폼 입고 흐느적대듯이 노래하고 웅얼웅얼 멘트하는 거 왜 이리 웃기는지. 지금 외모로 보면 그냥 술 좋아하는 40대의 영국 축구광 아저씨 같아 ㅋ (이상하게 술 한 잔 걸친 분위기가 나더란 말이지.) 비디 아이 노래 많이 안 들어봐서 나로선 뭐 그냥 분위기 맞춰 논 정도였지만, 잘 모르는 노래 부르는 오아시스(지다니의 표현이 이거 맞던가?) 같기도 하고, 그냥 노엘 빠진 오아시스 같기도 하고 그랬다는.
"장필순" 역시 공연을 본 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이 사람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하다는 느낌. 이미 그녀의 공연에 가 본 적도 있고, 그녀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키드니나 벨로는 그녀의 목소리가 날이 갈수록 허스키해진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그래도 그 음색이 여전히 그녀의 곡들에 잘 어울리긴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세션들, 특히 기타리스트 함춘호와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호흡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함춘호 그 나이(연세?ㅋ)에도 웃는 거 넘 귀여워 >.<
지산의 대미는 "스톤 로지스". ㅌㄹ마을 락음악 전문가 키드니의 설명을 통해 그들이 현존하는 브릿팝 밴드들의 효시 혹은 대부와 같은 존재라는 것, 그들 자신은 '롤링 스톤즈'와 '건즈 앤 로지스'의 음악을 좋아하고 계승하는 밴드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밴드 멤버들의 물리적인 '나이' 탓도 있겠지만, 뭔가 그들의 음악에서는, 브릿팝과 락의 전통과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땡땡이 의상을 입고 (관객들이 봤을 때) 오른쪽에 있던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지산에서 봤던 그 어떤 밴드들보다 멋졌던- 친구들을 통해 새로운 밴드를 만나고 그들의 음악을 알아가면서, 또 그들을 소개해준 친구들에 대해서도 한 가지씩 더 배우고 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공연에 함께 가거나 그들이 소개해주는 음악을 접하는 것은 이래저래 재미있는 경험이다. 지산에서 3일을 함께 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내겐 더 재미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스톤 로지스의 공연을 보며 쌍둥이처럼 서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고개를 까닥거리던 괘래니와 키드니의 모습을 본 것 역시 이번 지산의 또 다른 묘미였달까. ㅋㅋ
에필로그
지산 3일째 공연에 남아있던 건 처음이라, 키드니가 지산의 마약이라 표현하는 (예매나 숙소 예약, 종종 성의없는 라인업 등으로 속 썩일 때는 다신 안 오겠다 생각했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내년에도 또 와야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ㅋ) 불꽃놀이도 처음으로 보고, 주민들과의 공놀이도 처음으로 함께 했다. 숙소에 돌아와 남아있던 지다니, 벨로, 키드니와 함께 시원한 파라솔 아래에서 캔맥주를 기울이며 지산 마지막 밤의 뒷풀이를 가볍게 하고 다음날 아침 셔틀을 타기 위해 잠을 청했다.
그런데 우리의 지산은 아직 여기서 끝나지 않았던 것! 분명 전날 밤 오리역 행 셔틀을 사기 위해 매표소 부스에 가서 확인을 했더니, 직원이 아침 표는 아직 팔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 바람에 우리는 마음 놓고 9시 10분쯤 매표소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들이 표가 이미 매진이라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진짜 황당하고 황망하고 분노가 들끓는 가운데, 벨로와 지다니가 어젯밤 우리에게 표를 팔지 않는다던 알바생인 듯한 직원에게 항의를 하고, 그가 윗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돈을 내고 버스를 타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막상 '버스'가 왔을 때 보니 그것은 10인승쯤 되는 '봉고차'였을 뿐이고- 현금 내는 사람은 태울 수 없다는 어이없는 관계자의 생각을 꺾고 다행히 '버스'에 올라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오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안도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앉아 아이폰으로 트위터를 확인하는데 어젯밤 돌아갔던 괘래니가 '킨'의 공연 소식을 올려놓았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킨'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희희낙락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도 못 먹고 나왔던 우리 넷은 마침 역 근처에 보이던 부대찌개 집에서 해장까지 한 뒤에,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날 예정돼 있던 과외를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과 졸음을 뿌리치지 못하고, 과외 취소 후 긴 낮잠을 자는 것으로 사실상 지산의 사흘을 마무리했다.
2. 펜타포트
8.11.(토) 옥상달빛, Ash & SNOW PATROL
ㅌㄹ도사의 놀라운 예지력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던 "스노우 패트롤" 내한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올해 펜타는 무슨 일이 있든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공연 리스트 1순위에 올라 있었다. (0순위는 물론 대미언 ㅋㅋㅋ) 이미 몇 년 전에 이들을 본 적 있었던 ㅌㄹ마을 왕족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스노우 패트롤을 난생 처음 '알현'한다는 설렘에 지산이 끝난 후부터 2주가 너무도 길게 느껴질 지경. 사실 펜타에 가는 것은 순전히 스노우 패트롤 하나 보러 가는 것과 다름 없긴 했다. 그래도 펜타에 처음 가보는 것이다 보니 지산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그래서 "애쉬" 공연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한 키드니, 벨로와는 달리 나는 공연 시작 전에 좀 더 일찍 가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칵스" 공연을 보기 위해 더 일찍 가겠다는 지다니 정도로 부지런하지는 못하고 그냥 어중간하게 6시 좀 안 돼서 도착. 우연히 메인스테이지 입구에서 지다니를 만나 맥주 한 잔 일단 사들고 공연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찌나 자그마하던지 채 15분도 안 걸린 듯. 게다가 아스팔트 바닥의 공간에 싸구려 인조 잔디를 깔아 놓은 메인스테이지의 주변 경관은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간대에 보니 어찌나 을씨년스럽고 황량하던지. 설상가상으로, 내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밴드인데 기타 드럼 사운드가 센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 나는 주로 소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시간 즈음에 메인스테이지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팩트"의 음악은 몹시 시끄러웠다.
처음에는 걸어서 10-15분 가야 있다는 레이크사이드 스테이지에 가기가 귀찮아서 애쉬 공연 때까지 메인스테이지 주변에서 시간을 때우려던 나는 결국 레이크스테이지로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 스테이지에서 진행되는 "옥상달빛"의 공연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사실 그런 '홍대 여신'류의 옥쟁반에 구슬 구르는 듯한 아리따운 여성 보컬 밴드들의 노래, 손발 오그라든다. ㅎㅎ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여성 보컬의 음악은 "이아립" 정도.-- 그곳의 공연장 분위기가 어쩐지 더 나을 것 같아서 체험 삼아 가보기로. 하지만 지다니는 그 귀찮음을 무릅쓸 정도로 메인스테이지 근처에서 시간 때우는 것이 싫지는 않다며 그곳에 남기로 하여 우리는 일단 각자의 길로-^^;
노을이 지는 시원한 호숫가에 꾸며진 레이크사이드 스테이지의 무대는 역시나 쾌적하고 상쾌하긴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옥상달빛의 노래는 역시나 큰 감흥이 없었던. 동요 같은 귀여운 분위기도 있었고 역시나 목소리들이 예쁘긴 했지만, 내가 딱히 듣고 싶었던 노래는 아니었다. 되려 그들이 노래하는 무대 뒤의 호수에서 카약이나 소형 보트를 타고 노를 저으며 은근 슬쩍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 같은 것이 전반적으로 좋았고, 그저 음악과 잘 어울리는 착한 풍경이었다는, 뭐 그런 정도의 감흥.
공연이 끝나고 메인스테이지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니 애쉬 공연은 아직 시작하기 전. 통통니가 돗자리를 깔고 살짝 뒷쪽에 앉아서 공연을 본 덕분에 나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편하게 서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보컬의 라이브가 좀 아쉬운 면은 있었지만 (이 문장 쓰면서 몹쓸 농담 하고 싶어지네... '아쉬'운 면이 있는 밴드라 'Ash' 아니냐는. 쿨럭~ -_-;;;) 과연 벨로나 키드니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만큼이나 좋은 곡들이 많은 연주였다. 다만 원래도 아는 노래 별로 없는 데다 가사는 또 엄청 많고 빨라서 도저히 따라 부를 수가 없던데, 떼창을 유도해 보려다 적막만 흐르는 분위기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래도 관객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최대한 함께 즐기고 있다는 것에, 나름대로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고, 부디 너무 상처받진 않았길 바랄 뿐.
그들의 공연이 끝난 뒤, 1시간 반의 긴 휴지기 동안 맥주 한 잔을 곁들여 얼른 저녁을 먹었다. 음식 사는 곳에서도 전혀 기다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는 참으로 지산과 대조적이면서, 편했다. 최대한 빨리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재빨리 걸음을 옮겨 스노우 패트롤 공연 시작 20분 전에 메인스테이지에 도착했다. 올해 지산이 라디오헤드 공연을 보기 위한 인파였다면, 올해 펜타는 아마도 스노우 패트롤 공연을 보기 위한 인파였을 것 같다. 펜타의 인파는 지산의 인파에 비하면 극소수였다고 할 정도였지만, 메인스테이지 주변은 이미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인파를 뚫고 무대 중심 가까운 곳에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벨로와 나는 체력 비축을 위해 바닥에 잠깐 앉아서, 떼창 예상곡들(Run, Chasing Cars, New York 등)의 중요한 소절들을 연습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람들 머리 사이로 팔짝팔짝 뛰어오면서 나타나는 개리의 모습이 보이고 'Hands Open'의 전주가 흘러나오던 순간의 두근거림이란- (처음엔 그가 입은 카멜색 바지의 끝단 쪽이 안 보이는 탓에 읭? 바지를 안 입은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데, 지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폭소. ㅍㅎ) 'New York'을 부르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인터넷에서 찾았던 최근 셋리스트와 거의 일치했다. 익숙한 곡들도 좋았고,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나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체력과 목청으로 성심성의껏 노래를 하는 무대 매너도 물론 좋았다. 하지만 그런 본질적인 면들에 버금가는 이 공연의 주요 요소는 바로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봤을 때는 그렇게까지 잘 느끼지 못했던-- 한시도 미소가 떠나지 않던 사랑스런 얼굴! 그 얼굴 대체 어쩔 겨! >.< "세계 평화상 감"이라는 지다니의 표현에 적극 동의! 그리고 그 꼬불꼬불 파마머리 왜 일케 잘 어울리는 거지?! 예전 사진들에서 보았던 짧은 머리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게다가 그 길고 가느다란 팔 다리와 Lightbody라는 본인의 성의 싱크로율에 또 한번 감탄. 물론 우리 자리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가수 본인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얼굴도 너무 잘 보이고, 그런 순간마다 정말 공연의 감동은 백배, 이백배 상승이었다.
'Run'이 시작되고 떼창을 하려는 순간에 하필 나타난, 웬 외국인 꽐라녀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시적인 소요를 일으키긴 했지만, 다행히 일행 남자가 바로 처리를 해서 데려간 덕에 공연관람을 내내 망치진 않았다. 자신의 노래에 관객들이 반응을 해주거나 떼창을 할 때마다 개리 얼굴엔 물론 계속 미소가 번져 갔지만, 'Chasing Cars'를 떼창하는 관객들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떠오르던 감동의 눈빛이란. 참으로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이유로 그의 음악과 가수로서의 그가 더욱 좋아지기까지 했다. 나에게 있어 스노우 패트롤 음악의 매력은 가사가 난해하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뭔가 은유적이고 서정적인 깊이가 느껴진다는 점인 것 같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공연. 언젠가 'New York'도 직접 들을 날이 온다면 좋겠다. 앵콜 무대를 위해 나와 'Lifening'을 부르기 전에 그는 그 곡이 자신이 아는 가장 훌륭한 사람/남자인, 아일랜드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바치는 곡이며, 자신도 언젠가는 아이가 생길 날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그야말로 이젠 세계적인 밴드가 된 마당에도 여전히 소박함과 진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뭉클해졌다. 이렇게 사랑스런 남자는 대체 누구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될는지 참...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서도 ㅋ 암튼 'so sweet'라는 생각이 연신 들었다는.
5분 늦게 시작해서 예정시간보다 딱 5분 늦게 11시35분에 공연이 끝나고 급히 셔틀버스정류장으로 발을 옮겼지만, 줄은 이미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버스를 기다리는데 우리 열 명 정도 앞에서 줄이 끊어지고 버스가 떠난 후로 10분 정도 넘게 다음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사람들 정리를 하고 있던 안내원 아저씨가 12시 반 막차 버스가 이미 떠났는데 두 대를 증차해서 거기까지 탈 수 있는 사람들은 타고 나머지는 '알아서' 가라고 말을 하는데, 그 무성의함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 두 대의 버스를 타도 마지막 전철인 1시 차는 사실상 탈 수 없을 거라고 겁까지 주는데 너무 얄미웠다는. 어쨌든 줄의 앞쪽에 서있던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음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전철 막차가 대기하고 있던 검암역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55분쯤? 다행히 아직 막차가 떠나기 전 시간이어서 우린 버스에서 내려 미친듯이 뜀박질 ㅋㅋㅋ 키드니는 역시 테니스로 단련된 체력이라 그런가? 엄청 빨라서 깜놀! 57분에 무사히 모두가 전철에 올라 자리에까지 앉을 수 있었고, 서울에 무사히 도착. 상대적으로는 지산의 셔틀 운행 상황이 조금 더 낫긴 했지만, 어쨌든 지산 때도 그렇고, 펜타 때도 그렇고 돌아오는 것 때문에 속태운 거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미 공연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고, 스노우 패트롤 공연 끝난 직후부터 "킨" 예습 시작하려고 했는데, 아직도 개리 왕자님 미소의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아서 (ㅋㅋ) 지금도 스노우 패트롤 플레이리스트 계속 듣고 있다. 킨 예습은 9월부터 하는 걸로- ㅎ
@ 아. 그리고 지다니가 지산 포스팅 소제목 쓴 방식 맘에 들어서 나도 따라 했음을 밝혀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