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말에 올리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일찌감치 이 포스팅을 시작을 하긴 했다. 하지만 계속 찔끔찔끔 쓰다가 말고 쓰다가 말고를 반복하고, 또 넣어야 하는 사진 찾는 게 귀찮아서 뭉기적대고, 마침내 어제는 간신히 사진들을 찾아놓고 넣고 있는데 에러가 나서 넣었던 사진들 다 날아간 데다 외출할 일도 생겨 다시 엄두가 안 나서 일단 손을 놓았었다. 그래도 이제는 '베스트' 포스팅 안 하면 한 해를 어떻게든 마무리 한 것 같지 않은 허전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지금에라도 다시 정신을 챙겨 드디어 포스팅을 마무리했다. '베스트'를 통해 본 나의 2012년은 대략 이러했다.
2012 베스트 영화 3
신과 인간 (Des Hommes et des Dieux)
첫번째는 비교적 연초에 보았던 '신과 인간'.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부족한 나라는 인간은 항상,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들 자체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다소 신기하게 여져지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신기한 경우는 역시 종교인들이다. 종교를 가진 평신도들도 그렇고, 그것을 자신의 평생의 소명으로 삼는 이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다시금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믿음을 통해 자기 주변의 삶에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의 일상을 조직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 참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영화를 위해 충실히 익힌 배우들의 성가나 기도문 낭송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결국 아이튠즈에서 이 영화의 OST를 구입하기에 이르렀을 정도.
말하는 건축가
올 상반기는 사실 '말하는 건축가', '어머니', '두 개의 문' 등의 한국 인디 다큐들의 선전에 많이 감동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나를 단연코 사로잡았던 것은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 물론 '두 개의 문'이 좀더 시의적인 주제를 다룬 용기 있는 영화화였고, 작품을 풀어낸 방식도 좋았지만, 내게는 어쩐지 많은 말 속에서도 고요함을 느끼게 했던 '정기용'이라는 건축가의 존재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당시는 '건축학개론'의 열풍이 한창일 때였다. 그 덕에 영화가 더 잘 되었다는 농담을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감독님이 하시기는 했지만, 물론 두 작품은 영화의 장르로 보나 서사로 보나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긴 해도, 사실 그 영화를 본 뒤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을 때, '건축학개론'이 너무 시시하게 느껴져 버렸다. 뭐랄까, 같은 '건축'이라는 것이 영화의 소재로 쓰이면서도 얼마나 다른 무게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너무 여실히 보여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 영화를 통해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호감을 품었던 정재은이라는 감독을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었고,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를 통해 삶과 죽음까지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블루 발렌타인 (Blue Valentine)
세번째는 '블루 발렌타인'. 사실 미국에서는 이미 작년에 개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즐겨듣는 프레시에어 팟캐스트에서 이 영화 관련자들 인터뷰를 들으며 영화를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올해 중반 즈음에나 만날 수 있었다. 소소한 삶의 기쁨을 세심하게 담아내는 작품도 좋지만, 서늘한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보여주는 영화들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무서우리만치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랑과 이별 혹은 사랑과 권태의 대위곡이라 할 수 있을 듯한 이 작품의 구성은 그 설렘을 표현하는 데서도, 그 지긋지긋한 권태를 표현하는 데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 둘을 끊임없이 병치하는 배치로 인해 마치 나 자신이 이리저리 휘어졌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그 두 가지 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두 가지의 상황 사이에 실제로 한 달 정도의 간극을 두고 그 사이 기간 동안에는 배우들이 실제로 그 권태기부부처럼 살도록 하여 그 감정에 몰입케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여주인공은 남자주인공에게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비밀이 있고, 남자주인공은 그 비밀을 캐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 과정을 대본에 쓰지 않고 오로지 그 상황만을 주고 두 배우로 하여금 한쪽은 비밀을 무조건 지키기 위해, 다른쪽은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라고, 하는 지문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실제 장면을 보면 실로 놀랍다. 뭔가 다시 볼 엄두가 나는 영화는 아니지만, 계속 곱씹어 생각헤 보게 한다.
그 외에도 베스트의 물망에 올랐던 작품들은 '두 개의 문', '어머니', '멜랑콜리아', '레미제라블', '대학살의 신'. 특히, 2012년에 본 마지막 영화였던 '레미제라블'은, 볼 때는 라이브로 부른 노래들 가운데 거슬리는 것도 좀 있었지만 (러셀 크로우의 감정 없는 물소 소리 어쩔-_-;;;) 앤 해서웨이의 처절하고도 가련한 "I Dreamed a Dream"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기억이 난다.
2012 베스트 공연 3
대미언 라이스 내한 공연
올해는 정말 공연을 많이 가기도 했지만, 갔던 공연들이 어지간하면 다 좋았기 때문에 세 개를 꼽기란 정말 힘들었다. 물론 이론의 여지가 없는 '대미언 라이스'의 공연 같은 것도 있긴 했지만. ㅎ 공연을 본 뒤, 후기를 기다린 주민들도 있었겠지만, 난 사실 그의 공연에 대해서는 어떤 후기도 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처음 그의 음악을 영화 'Closer'에서 듣고, 다시 음반을 통해 접하고, 몇 년 전 올 뻔하다가 불발되었던 내한의 기회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음악과 관련된 내 인생의 몇 번의 마디들에서, 그의 음악을 직접 접할 기회에 대한 갈망이 너무도 커져버렸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음악을 마침내 내 눈앞에서 듣게 되었을 때는 그저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내가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삶이 고마웠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리고 그의 음악을 직접 듣고 나면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더 살아서, 그의 음악을 몇 번이고 더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올댓스케이트 썸머
두번째로 꼽은 '올댓스케이스 썸머'와 베스트 3의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던 공연들은 펜타포트의 스노우 패트롤 공연과 킨 내한, 그리고 지산 락페. 물론 이 공연들이 부족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역시 연느님의 '록산느의 탱고'를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벅찬 감동을 뛰어넘기는 어려웠다. 개리의 선한 웃음에 아주 녹아내리긴 했지만 (ㅋㅋ), 나에겐 연느님의 존재감은 '스노우 패트롤'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하다. 김연아의 경기를 살아 생전 직접 한 번 볼 수 있다는 꿈이 이뤄질 수 있는 기회가 내년에 바로 코앞에 닥쳤는데, 예매를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 ㅠㅠ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마지막은 나의 하반기, 실은 2012년 12월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불과 한 달여의 공연 기간동안 무려 3번을 봤다. 사실 친한 언니와의 연례행사로, 나는 매년 꾸준히 한두 편의 연극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간 그 만남은 연극을 즐기는 것보다는 그것을 핑계로 그 언니를 만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른 '(연)극적' 연기의 어색함은 항상 나를 조금은 낯간지럽게 하는 면이 있는 터라, 연극이란 장르는, 보긴 보지만 크게 몰입을 한다거나 감동한다거나 하는 점은 없었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극히 한정된 무대의 제한을 기발하게 이용하는 무대 장치라든가 '컷'이나 카메라 앵글의 힘을 빌지 않고 오로지 지난한 습득의 과정을 통해 대사와 연기를 (상대적으로) 한 호흡에 끊김없이 보여주는 것은, 마치 자유시나 소설과는 다른 하이쿠나 시조처럼, 형식적 제약을 하나의 게임의 규칙처럼 활용해 문학성을 발현하는 것과 같은 재기발랄함이 있어 종종 감탄하기는 했었다.
이 연극은 그 모든 것에다, 실험적인 연출의 힘이 더해졌다. 사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같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기반한 소설을 연극 무대 위에 올린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의문마저 들었다. 헌데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소설의 문장을 직접 낭독하는 듯한 대사를 적극 활용한 연기라든가, 소설가 태원과 그가 창작해낸 소설 속 페르소나 구보가 때로는 분리되었다 중첩되었다 하면서 뒤섞이며 등장하는 방식, 게다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경성'을 흥미롭게 작품 안에 녹여낸 영상물 등의 활용은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소설 속에서 과연 '실제적 인물'로서 존재하는가 싶었던 차장이나 선 본 여인 등을 각각의 캐릭터로 적극 살려내며 극을 풍성하게 만들었던 점 역시 훌륭하고, 무엇보다 박태원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극작가/연출자의 충실한 연구와 깊은 애정이 돋보였다 하겠다.역시 가장 최근에 봐서 그런지 할 말이 가장 많다는 (ㅋㅋ)... 점도 있고, 사실 별도의 후기를 써야 하는데, 아직 안 써서 말이 많아졌다.
그 외 기억에 남는 것은, 물론 킨 내한, 펜타포트의 스노우 패트롤, 지산 락페, 그리고 성시경 콘서트 '하루'.
2012 베스트 클래식 공연 3 (신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성토마스 합창단
올해는 갑자기 클래식에 꽂힌 벨로와 키드 덕에 다른 해보다 더 많은 클래식 공연에 가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성토마스 합창단. 연초에 간 첫번째 클래식 연주회. 특히 어린이 합창단의 맑은 음성과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성스러움이 조합될 때의 느낌이 뭉클했다.
피터 비스펠베이 바흐 무반주 첼로 전곡 연주
두번째는 피터 비스펠베이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 공연. 이 곡은 첼로곡의 성서라 일컬어지는 작품이기도 하고, 실제로 나도 가장 좋아하는 첼로 곡이기도 하다. (뭐, 아는 첼로 곡이 워낙 적어서도 그렇고 ㅎ) 로스트로포비치의 엄숙하면서도 정직한 느낌의 연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이제 콘서트장에서는 직접 들을 수 없는 연주가 되어버렸고. 그런 와중에 우연히 피터 비스펠베이의 공연에 가게 되었는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미샤 마이스키나 요요마의 연주처럼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혹은 대중적이지는 않으면서도, 유연하고 세련된 그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을 콘서트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돈 크레머 & 크레메라타 발티카
기돈 크레머의 공연은 사실 다른 전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예술의 전당 내에서 틀어주던 홍보영상물을 보고, 공연 날짜에 임박해서 알게 되어 간 공연이었다. 이틀의 공연이 잡혀 있었는데, 둘째날이 좀 늦게 공연 날짜가 잡혀서인지, 상당히 임박한 때였는데도 가장 싼 합창석에 잔여석이 아직 있었더랬다. 그래서 합창석을 예매했었는데, 세상에, 1층 앞쪽의 R석들 표가 너무 안 나간 나머지, 합창석을 업그레이드 해줬다! 므하핫- (내가 원래 산 표의 5배 가격이었던 것 같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뛸듯이 기뻤는데, 기돈 크레머의 공연은 바이올린 연주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견고한 편견을 깨주는 그런 연주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바이올린보다는 첼로의 음색을 더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뭔가 날카롭고 찢어지는 음색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헌데 기돈 크레머의 연주를 통해 들은 바이올린 소리는 부드럽고도 아름다웠다. 이것이 진정한 프로가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공연이었다. 물론 기돈 크레머가 창립하고 발굴한 발틱 지역의 유망한 연주자들을 통해 구성되었다는 크레메라타 발티카(아마도 발틱의 정수, 뭐 그런 정도의 의미로 붙인 이름이지 싶다.)의 연주 역시 훌륭했다.
2012 베스트 전시 3
리움-서도호 '집 속의 집'
우연히 밤에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게 된 프로그램에서 전시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묘하게 관심이 생겨서, 작가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른 채로 가게 되었던 서도호의 '집 속의 집'. 이 전시를 기점으로 한국가구박물관과 안동여행까지, 뭔가 올 상반기는 부러 한옥을 테마로 하여 엮기라도 한 것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이어졌다. 암튼 전시 후기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향수'라는 극히 추상적일 수 있는 감정을 구상적인 예술 형태를 통해, 아름다우면서도 유머 넘치치게 풀어냈던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품에 무엇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은, 무서우리 만치 치밀하고도 집요한 섬세함 또한 이 전시와 서도호라는 작가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한국가구박물관-구찌91주년 특별 아카이브
'구찌91주년 특별 아카이브전'은, 전시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한국가구박물관'이라는 공간을 꼭 방문해보고 싶은 호기심에서 갔던 곳. 그리고 다녀온 후에도 그 전시 자체가 좋았다기보다 역시 그 공간에 대한 무한애정 때문에 베스트로 꼽은 전시다. 허물어버린 창경궁 일부에서 가져온 기와를 고스란히 썼다거나, 순종의 비가 살았던 사가를 옮겨왔다거나, 송광사의 창고를 복제해 왔다는 여러 형태의 전통적 한옥이 새로운 공간에 배치되면서 서로 어우러져 빚어낸 아름다움이 참으로 감탄을 자아낸 곳이었다. 한옥이라는 곳에 정말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거듭거듭 불러 일으키는 그런 집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천하제일 비색청자전
이 전시는 원래 국립중앙박물관에 마야문명전을 보러 갔다가 지다니가 우연히 전시 일정을 보고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중에 따로 가게 됐던 곳. 다양한 청자의 기품있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러스한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즐거웠던 전시. 게다가 전시도록은 다시 봐도 참으로 본전을 충분히 뽑고도 남음직한 좋은 책이었다. ㅎㅎ
2012 베스트 책 3
일단, 이 부문은 글을 쓰기에 앞서 변명을 좀 하고 들어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 워낙 평소의 테덕(테레비 덕후) 생활에다 전시, 공연을 유난히 많이 보러 다닌 한 해가 되다 보니, (스스로 찾아 읽은) 책은 정말 기록적으로 적게 읽은 데다, 이렇다 할 만큼 기억에 남는 책은 더더욱 적었던 것 같은 한 해였다. 매해 맨 앞에 넣는 이 부문을 뒤로까지 끌어내렸어야 할 정도이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할 말 다 한 셈. 부끄러울 따름이고, 2013년은 좀 더 독서에 힘쓰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정기용, '기적의 도서관: 정기용의 어린이 도서관'
말하는 건축가 테마 여행을 따라갔을 때 책사회에서 선물로 주었던 책. 영화를 통해 접했던 정기용 선생님의 건축 철학이나 그 과정 등을 그 분의 글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조이담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강력한 여파로 사게 됐던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마치 연극의 연출을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소설 속에 당시의 사회상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면 갖가지 자료들을 링크하여 소설 속의 사회사를 소개하고 문맥을 제시한 것은, 산만한 면도 없진 않았지만, 어쨌든 신선한 시도였다고 생각이 된다. 뭐, 결정적으로는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을 거의 십 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그 원문 내용이 새삼스럽게 나에게 절실하게 다가온 점이 이 책을 베스트로 선정케 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지만. 아마도 올해 유독 두드러졌던 나의 룸펜스러운 일상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아서 더 그랬던 것 같은데, "대체, 그 애는, 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겐가"하는 어머니의 생각 부분 등에서, 뭔가 폭소와 쓴웃음이 동시에 터져나오는 것 같은 착종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했던, 박태원의 예리한 포착 능력에 새삼 놀랐었다.
논어
올해는 '논어'를 재발견한 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난 사실 대학 시절부터 해서 누군가의 강의를 겸해 논어를 강독한 것이 올해를 포함해서 최소한 세 번은 된다. 헌데, 맨처음 읽을 땐 글자 해독하기도 급급하고 심지어 글자뜻을 알아도 그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헌데 세 번째쯤 되니, 이제 겨우 이 책의 '재미'를 알 것 같다. 다만 이 책 독서의 맹점은, 아직도 혼자서는 해석은 커녕 해독조차 어려워 버벅대는 정도라 내가 '읽는다'고 하기 어렵다는 점이지만, 언젠가는 이 담박한 글의 진정한 의미를 그러잡을 수도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같은 것마저 생겼다.
2012 베스트 음반
성시경, '처음'
노래도 잘 하고 곡도 늘 평균적으로 좋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노래가 그 노래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소 멀리 했던 성시경의 음반을 오랜만에 접했던 것 같다. 사실 2011년에 나왔던 앨범이었는데, 올 가을 새삼스레 많이 들었었다. 특히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가사를 썼던 작사가가 썼다는 "처음"이라는 곡은 정말 들을수록 좋은 곡.
Pieter Wispelwey, 'Johann Sebastian Bach: 6 Suites per Violoncello Solo Senza Basso'
피터 비스펠베이 공연을 다녀온 후에 산 앨범. 헌데 CD는 한국에는 절판이 된 데다, 아마존 같은 데를 통해서 사려니 배송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을 뿐 아니라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결국 아이튠즈에서 파일 형태로 구매했다. 피터 비스펠베이는 한국 공연 후, 이 곡을 새로 녹음할 계획이 있다고 하던데, 예전의 이 녹음을 들으며 다시 나올 그의 음반을 기다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다.
Keane, 'Strangeland'
사실 펜타포트에서의 스노우 패트롤 공연이 너무 좋았던 여파로 킨 내한공연 예습은 다소 소홀했었다. 하지만 공연을 다녀온 후에 더 열심히 들었던 것 같은 앨범. 1집의 아성을 넘어설 수 있는 정도의 명반은 아니지만, 비교적 그 때의 킨의 음악으로 돌아온 듯한 곡들, 경쾌한 리듬감이 있으면서도 선율은 어딘지 쓸쓸한 정조의 곡들이 참 좋았다. 'Silenced By the Night'나 'Disconnected', 'Sovereign Light Cafe'도 좋고, 무엇보다 그냥 앨범을 재생하면서 첫곡 "You Are Young"이 흐르기 시작할 때, 이미 기분이 좋아진다.
2012 베스트 드라마
월랜더 (Wallander) - 영국
사실 "셜록"의 빈 자리를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끝에, 몇 년 전에 이미 두 시즌을 방영하고 올 봄에 3시즌을 방영한 이 시리즈물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던 것. 지적 유희에 가까운 "셜록"의 사건 해결에 반하는, 실존적 고뇌에 몸부림치는 커트 월랜더의 사건 해결 방식이, 범죄 드라마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던 시리즈였다. 셰익스피어 극의 남주인공으로 주로 만났던 케네스 브래너를 몇년만에 다시 보게 된 것도, 그의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감상하는 것도 이 시리즈가 준 보너스 즐거움. 영국의 시리즈물 방영 사이클로 보건대 내후년에나 다음 시즌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마지막 시즌이 될 거라 하니 벌써부터 아쉬움이 앞선다.
컨티뉴엄 (Continuum) -캐나다
나의 경우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를 고를 때, 작품성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배우인데, 바로 그런 이유로, 여주인공 역할 배우 때문에 보게 되었던 드라마.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결국 기대를 능가한 진지한 주제의식과 정교한 플롯 덕분에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었던 드라마였다. 열 편으로 이루어진 첫 시즌이 흥미롭게 끝막음을 하고, 다음 시즌을 더 기다리게 한다.
응답하라 1997 - 한국
나로서는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과 가능성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대중 문화의 측면에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올해의 신드롬이었던 드라마. 한국 드라마는 주제나 플롯이 괜찮아도 소품이나 플롯을 이어주는 디테일에서는 항상 뭔가 엉성하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되려 극히 통속적이면서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도, 그것을 설득력있게 변주하는 인물과 전개가 얼마나 큰 극적 재미를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드라마의 치밀한 디테일들이 작품을 보는 데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올해 베스트에 어쩌다 보니 미국 드라마는 하나도 포함되지가 않았다. '모던 패밀리'야 항상 평균 이상을 하는 꾸준한 수작이지만, 이미 예전에 뽑은 적도 있었고, 새로운 좋은 드라마들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 같은 건 없었던 편이라, 물론 너무 재밌게 보고 있지만 굳이 목록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굿 와이프'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다루고, 그 안에서 캐릭터 간의 지능적인 두뇌게임이 돋보이는 법정드라마로 매우 훌륭한 작품이지만, 역시나 4시즌에 접어든 드라마라 '충격' 효과가 적었기 때문에 일단 포함시키지 않는 걸로. 그 외에는 '멘탈리스트'도 가벼운 범죄 수사물로는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그냥 시간 때우는 데 재밌는 정도. 하지만 그런 재미도 중요하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월랜더'처럼 무거운 드라마는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보겠다는 엄두를 내고 결심을 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멘탈리스트' 같은 드라마는 되려 하루가 무겁고 힘이 들 때 보면서 좀 맥놓고 웃을 수도 있어서 좋다.
2012 지름
아이폰 4S 화이트+케이트 스페이드 땡땡이 케이스
애플빠라면 모두들 아이폰 5를 목빼고 기다리던 올 겨울, 나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읭?) 4S 화이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ㅋㅋ 그리고 그 미모(?)에 걸맞는 완벽한 의상이라 할 수 있는 케이트 스페이드의 땡땡이 케이스까지 마련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명실상부 '비단 위에 꽃을 얹은' 격이 아닐지 ㅋㅋ
마켓엠 협탁 & 사다리
2011년이었던가? 마음에 쏙 드는 화장대--를 가장한 수납장 ㅋ--를 사긴 했는데, 그에 걸맞는 의자는 여태 사지 못해 항상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올해말 마켓엠의 시즌오프라 할 수 있는 "해피 위크엔드" 기간에 기를 쓰고 가서, 그간 눈독 들이고 있었던 작은 협탁을 사서 화장대 의자를 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물론 평소에 보기 힘든 큰 세일 앞에 무너져, 역시나 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사다리형 수납장까지도 결국 지르게 되었던... ㅋ 그래도 후회는 없는 지름.
라 사르디나 런던올림픽 기념 에디션 Guvnor
그간 로모의 '라 사르디나'를 내심 사고 싶긴 했었지만,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을 찾지 못해 망설이던 차에, 런던올림픽 기념 에디션으로 출시되었던 한정판 Guvnor를 보는 순간 망설임 없이 결정하게 되었다. 남색 바탕 위에 런던의 갖가지 명소들이 귀여운 일러스트로 그려진 디자인은 지금도 흡족. 아직 촬영 기술은 갈고닦지 못해 사진의 결과물들은 그 정도로 흡족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쉬움이랄까. ㅎ 올해는 더 열심히 찍어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리라- (헌데 로모 사고 나니 이젠 또 폴라로이드 갖고 싶어져. 욕심이 끝이 없어 끝이...^^;;;)
2012년의 발견
한국 인디다큐의 재발견
올봄 나의 인상적인 영화관람 목록의 8할은 안 되더라도 5할은 채웠다 할 수 있을 법한, "어머니", "말하는 건축가", "두 개의 문"으로 이어진 한국 인디 다큐 작품들은 인디 영화라는 장르와 다큐라는 장르를 여러 면에서 다시 보게 해 주었다. 진정성 있는 주제를 담으면서, 영화적 완성도와 재미도 놓치지 않았던 이 작품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모로 2012년의 수확이었다.
한국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 서기웅
인디다큐와 더불어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보게 된 한국의 연극. 연극을 정말, 진심으로, 일말의 아쉬움도 표명할 여지 없이 완벽하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본 것은 아마도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통해 '서기웅'이라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를 발견하는 계기도 되었다. 박태원과 이상을 둘러싼 근대 초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몇 년 전부터 연작처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 첫번째였던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은 놓쳤지만, 이상의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의 박태원과 이상의 이야기를 만담 형식으로 풀어서 보여주는 연극을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작품도 반드시 볼 생각.
서도호
그리고 물론, 2012년에 문화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가장 먼저 선사한 서도호라는 예술가와 그의 작품 세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시상식처럼, 연말에 봤던 작품들의 임팩트가 지금은 가장 깊이 각인되어 있긴 하지만, 이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역시 2012년의 큰 행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의 발견에 해당하는 인물이 둘 다 "서"씨네. 희한한 우연이로군.
2012년 베스트 여행(신설)
안동, 영주, 경주는 물론, 그 외에도 "말하는 건축가" 테마 여행과 친구의 결혼식을 핑계로 푸켓까지 다녀 왔으니, 올해는 나로서는 참 많은 여행을 한 해였다.
안동여행
하나하나 잊기 힘든 추억이지만, 난생 처음 가본 안동 여행은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발견케 해준 기회였다. 사실 그 이후에 영주와 경주로 여행을 가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은 결국 안동 여행의 유쾌한 경험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운 날씨이긴 했지만, 그 덕분에 그늘에서의 잠깐의 휴식과 시원한 미숫가루의 맛을 더욱 음미하게 해주었던 하회마을에서의 하루도, 빗속에서 그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더 빛났던 도산서원에서의 하루도 참 잊히지 않는다.
말하는 건축가 테마 여행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다가, 정기용 선생님의 발자취를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가며 편안하게, 게다가 공짜로, 볼 수 있었던 기회는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런 여행이 가능했던 것 자체가 뭔가 올해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푸켓 C양 결혼식
마지막은 대학원에서 나와 샴쌍둥이처럼 함께 했던 C양의 결혼식. 사실 동남아 기후는 역시 나에겐 별 매력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긴 했지만, 그래도 마치 하나의 이색 문화 체험과도 같았던 결혼식,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 중 한 사람의 특별한 날이었다는 것 자체가 이 여행에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을 부여했다.
2012년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 관광의 해.
정말 게을러 빠져서 어지간하면 몸을 움직이지 않는 내가 올해 우리나라를 돌아보는 여행을 이래저래 네 번이나 떠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록적인 일인 것 같다. ㅋ 그와 더불어, 올해는 문화생활 측면에서도 유독 한국 영화, 한국 연극, 한국 예술가나 한국 전통과 관련된 전시 등을 많이 보기도 했고, 진심으로 즐기기도 했다. 특히 서도호, 한국가구박물과, 비색청자전 등 전시 부분에서 뽑은 베스트 3가지는 모조리 한국과 관련된 것이었고, 영화 "어머니"와 "말하는 건축가", "두 개의 문"도 그렇고,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 등 모두 그 나름대로 좋았다. 특히 간만에 재미있게 보았던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그 순간 그곳에 있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매번의 공연이 그 날의 배우들의 컨디션에다 관객들의 호응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연극의 유일성, 유한성 혹은 휘발성 때문에 여러 번을 보기도 했고, 더 애틋한 마음으로 매순간을 음미하며 보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