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주민들이 각자, 혹은 함께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제 이 영화를 볼 때를 놓쳤는가 싶었던 즈음, 뒤늦게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왜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은가. 극장에 영화는 버젓이 걸려 있지만, 분명히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도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극장에 갈 생각이 선뜻 나지 않는.) 그것은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김혜리 기자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과 글은 최근 내가 영화를 보고, 보기로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다.) 그녀는 이 영화가 유일하게 3D로 영화를 보는 경험이 그렇지 않은 것과 차별점이 있었던 영화라고, 3D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눈물을 훔치게 했던 영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극장에서 3D로 이 영화를 볼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도입부의 장면부터 이 영화의 화면은 그저 다채롭다거나 생동감 있다,는 인상을 넘어서는, 거의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 위를 걷는 듯한 홍학의 사뿐한 걸음걸이가 아직도 눈앞에 그려진다. 동물원 동물들의 나른한 일상을 담은 인상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한 이 영화는 3D로 펼쳐질 영상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인다.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고래 장면이나 날치(?)들의 역동적인 이동 장면 등 망망대해 위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풍경들은 모두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 관한 재미있는 뒷얘기로, 이안 감독이 감독으로서 자신이 영화작업을 하는 경우 가장 꺼리는 것 세 가지가 어린이, 동물, 혹은 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결국 그 세 가지와 한꺼번에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헌데 그는 정말 그 세 가지 모두를 가지고 영화가 아니라면, 그것도 3D 영화가 아니라면 이렇게 구현될 수 없었을 것만 같은 바다의 표정, 호랑이의 눈빛에서, 진정 서정이 녹아든 서경을 연출해냈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지 좀 돼서 자세한 장면장면이 세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헌데 무심히 사라져가던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 외에 오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혹은 장면은 사람/생명을 갉아먹는 섬 에피소드와, 이미 자신의 생존담을 마치고 나서 보험회사(?)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해주었던 "또 다른/현실적" 버전의 이야기를, 이야기거리를 찾아 그를 인터뷰하러 왔던 작가에게 전해준 뒤, "당신은 어느 쪽 이야기를 믿나요?"라고 물을 때 파이의 표정었다.
이 소설/영화의 모든 꼭지들이 그렇지만 식인섬(?)은 우리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한 고개에 관한 우화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성취, 혹은 깨달음에 이른 뒤, 그것이 전부라고 마치 인생과 우주 자연을 꿰뚫는 진리 혹은 통찰인 양 자만하고 안주하는 속성이 다분히 있다. 그 안주가 결국 자신을 잠식하고 집어 삼키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유사-진리 의사-깨달음에 도취해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파하려 들고, 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완전히 자신을 소진한 뒤, 리처드 파커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던 파이처럼, 그 깨달음의 허상을 깨고 나와, 나를 향해 뒷걸음질은 커녕 사소한 마지막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사라지는 무심한 진리의 뒷모습을 초연히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진리나 깨달음은, 나를 살찌우거나 돌아보아 주기는 커녕, 어느 순간 나와는 아무런 상관조차 없었다는 듯 홀연히 사라져버리더라도, 그저 함께 할 수 있는 동안 나를 모두 소진할 정도로 함께 했다는 그 과정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그것이 그 섬에 잠식될 뻔했던 파이와 그를 구원하고도 구원했다는 자의식 하나 없이 표표히 사라지던 리차드 파커가 담고 있는, 여러 메시지들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당신은 어느 이야기를 믿을 것이냐"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묘하게도 어떤 이중성을 느꼈다. 그것은 물론 자기자신의 협소하고 누추한 경험치를 넘어서는 다른 이들의 현실이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사람들에 대한 일갈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내내 담아냈던 망망대해에 던져져 살아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는 겪은 신이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잔혹한 경험을 통과하며 성장해나가면서, 인간이라는 미미한 존재를 넘어서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던지는 한 인간의 다채로운 질문은, 그런 비판과 일갈에 충분히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것을 충분히 납득하면서도 이러는 건 바로 파이가 경계했던 내 안의 비루함과 편협함이 고개를 쳐드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나는 어머니와 요리사와 선량한 아시아인 청년과 함께 배에 올랐던 경험에 관한 그의 짧은 이야기를 리처드 파커와 얼룩말, 오랑우탄과 함께 했던 그의 여정에 포개면서 솔직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즉, 관객이나 독자로서의 우리가 현실적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삶의 과정에 대해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일단 평가하고 비판하려 드는 것만큼이나, 화자나 작가로서의 어떤 이는 그렇게 또 자신의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각색하고 미화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고. 마치 (실패한) 연애담을 서술하는 화자 가운데 "나도 한번쯤 누군가의 ㅆㄴ이었다"고 하는 이가 없는 것마냥,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는 나라들이 자국의 역사적 과정에 대해 충분히 객관적인 반성이나 평가를 하지 않는 것마냥, 나의 이야기인 한 그것은 충분히 아름답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혹은 최소한의 이유가 있는 것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요즘 들어선 인간의 자기합리화나 자기정당화란 어쩌면 인간의 생존욕구와 그 자체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종종 하게 되기도 해서, 그 마지막 장면의 파이의 표정이 더 미묘하게, 그리고 이렇게 뒤틀려서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것은 내 현재의 감정이 빚어낸 과잉해석이라고 해도, 이 영화의 가치와 다층적 서사의 무게가 줄어들진 않는다.
키드니가 처음 이 영화에 대한 포스팅을 했을 때, 아마도 댓글로 얘기 했던 것 같은데, 극장에서 처음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을 때, 이안 감독의 이름이 나오기 전엔, '뭐야, 장난해?'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도대체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대양을 건넌다는 설정을 하는 게 제정신이냔 말이다. 물론 픽션에 대해 사실적이거나 현실적 설정을 요구하려 드는 나의 태도가 일단 독자나 관객으로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ㅋ 허나 감독이 '이안'이라는 것을 봤을 땐 얘기가 달라졌다. 그만큼 이안 감독은 희한한 감독이다. 특정한 장르/서사에 강한 감독은 일단 거의 자기 복제에 가까운 작품 경향을 반복하거나, 기껏 다른 장르를 시도해 보아도 실패하는 일들이 많다(고 느껴진다). 헌데 이안은 다르다. 그의 작품들은 초기에 소위 가족 드라마로 분류될 만한 몇 작품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가 어찌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뭔가 계속 달라져 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꾸준히 수작이거나 걸작이었다. 그래서 그가 뭔가 생뚱맞다 싶은 영화를 만들었을 때도 일단 그를 신뢰하게 된다.
내가 들었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처음 감독 데뷔를 하고는 아무래도 제작지원을 받을 수 없다 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신이 써야 해서 시나리오 작업도 병행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나름대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가족 드라마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감독으로서 이름이 난 뒤에 좋았던 점은 더 이상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도 자신이 해 보고 싶은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할 수 있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기회를 십분 활용해 역사물, 로맨스, 판타지, 액션 등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단선적이거나 일면적이지 않은 메시지와 관점을 담은 영화들을 마음껏 연출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는 자신과 줄곧 함께 영화 작업을 해온 스태프들도 많이 빠지고 (특히 가장 중요한 한 명을 언급했는데 잊어버려서 ㅋ)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자신의 시도 가운데서도 가장 낯선 시도였다고 했고, 자신에겐 영화가 자신의 리차드 파커, 자신의 호랑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인터뷰에서의 말처럼, 그는 이 영화에 특히 자신을 많이 투신한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다음 작업은 무엇이 될지 생각조차 할 여력이 없을 지경이라고 할 정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다음 작업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