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은신처

grey room 2013. 6. 18. 14:57


샤를 단치를 읽은 뒤 독서에 관해 쓴 키드니의 포스팅을 보고, 뭔가 환기되는 바가 있어 몇 자 적어본다. 내가 어려서 책을 읽었던 건 기본적으로 말보다 글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건 일차적으로는 내가 말을 너무 못해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아무 것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랬을 터이다. 그리고 꼭 나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글을 쓸 때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을 걸러내기 때문에 그랬다. (요즘 같은 SNS 배설의 시대에는 그렇지만도 않지만, 뭐 전통적으로는 그렇지 않나 싶다.)


우선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걸 좋아했지만, 나 자신의 표현 수단으로서도 항상 말보다는 글을 선호했다. 뭐랄까, 난 말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는 것이 항상 어려웠지만, 글을 썼을 때는 --과제로 낸 레포트가 됐든, 편지가 됐든-- 전혀 존재감을 주지 않았던 나에 대해 상대가 '얘가 누구였지?' '이런 애가 있었나?'하고 생각해 보게 되는 '약간의' 반전의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그런 반전을 어느 정도는 즐기기도 했고. ㅋ


헌데 생각해 보면 글이란 건 그렇다. '표현'의 수단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더 강력한 '도피'나 '은신'의 수단이 아닐까 싶은. 내가 글을 쓰는 건,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드러내고 싶어하는 '특정한' 나 자신의 모습이고, 어쩌면 그 글 속으로 나 자신을 깊이깊이 숨겨서 초라하고 비루해 보이는 나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같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던 작가의 이른 바 '실제' 모습을 보면 종종 실망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통해 표현된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상'이 실제의 그 인물이 투사하고 있는 '상'과 어긋난다고 느껴서. 어쨌거나 글을 통해 표현된 것도, 그 글에서 표현되지 않았거나, 그 글이 표현한다고 생각했던 부분과 어긋난 것도, 그 총체로 보면 모두 그 사람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점이 또한 예전에 벨로가 자신의 포스팅에서 말했던 것처럼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이 반드시 깊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 경우 벨로가 말한 '깊이'란 아무래도 인성적인 측면에서의 '깊이'를 지칭한다고 한정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복잡한 내면을 가지게 되고, 그런 점도 '깊이'라면 깊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책을 많이 읽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작가가 되지 않지만, 키드니가 서평을 쓴 샤를 단치의 말처럼 '작가가 될 사람은 어려서부터 독서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니 작가들이란 결국 독서광과 양날의 칼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고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란 반드시 인성적으로 깊이를 얻은 사람이라기보다, 글을 통해 필요한 부분만 잘 드러내면서 동시에 글 속에 잘 은신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는. 


뭐, 하지만 반드시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문화적으로 관심의 폭과 깊이가 넓은 사람이 (친구로서는? ㅎㅎ) 더 흥미롭고 재미가 있으니,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려 들 수밖에는 없지만, 어쨌든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을 가까이 한다면 그 '재미'만큼이나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할 듯. ㅋ 



마지막으로 미국의 작가 겸 예술가라는 존 워터스(John Waters)의 한 마디를 인용하며 마무리-


"If you go home with somebody, and they don't have books, don't fuck 'em!"

(누군가와 집에 갔는데, 그 사람 집에 책이 없다, 그럼 그런 사람이랑은 자지 마!")

음, 사실 좀 더 원색적으로 번역해야 되는데,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음... ㅋㅋ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