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주목받은 새 시리즈라는 얘기를 여름에 접하긴 했었는데, 그 당시엔 별로 땡기지 않아서 보지 않다가 며칠 전에 보기 시작한 "Orange is the New Black". 그런데 이거 정말 제법 괜찮다. 이 시리즈는 파이퍼 커먼(Piper Kerman)이라는 실제 인물이 쓴, 시리즈와 같은 제목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국 드라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파이퍼 챕먼(Piper Chapman)으로 성이 약간 바뀌어서 나온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미국의 백인 중산층 (사실 미국의 중산층은 우리 나라에서 통상적으로 말하는 중산층보다는 좀더 상류층에 속한다고 봐야 하지만) 가정에서 나고 자란 파이퍼가, 20대 때 일종의 호기심으로 만났던 레즈비언 애인을 위해, 그녀가 속한 마약밀매 조직의 돈세탁한 돈을 운반해준 것이 나중에 폭로가 되면서 15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을 그린 것. (제목이 "Orange is the New Black"인 이유도 결국 미국의 죄수복이 주황색이라 그런 것.) 이 일이 있었을 당시에 그녀에게는 이성애자 약혼자가 있었다. 실제 현실에서의 파이퍼는 출감 후 이 약혼자와 결혼을 해서 지금 까지 살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도 과연 그대로 그려질지 다소 궁금하다.
보통 드라마에서 감옥이 나오는 경우라면 전체 시리즈에서 일부분을 차지하거나, 전체 시리즈에서 다루어지더라도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궁극적으로 탈옥을 할 공간으로 그려지는 정도일 텐데, 이 드라마에서는 15개월동안 "생활"하는 곳으로 그려지는 설정이라는 점과, 특히 주인공이 여성이라 여성 죄수들의 삶이 다루어지는 것도 독특하다. 또 대부분 감옥에 가는 주인공이 나오는 경우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개인사나 잘못된 선택의 연속들이 필연처럼 그려지는데, 이 드라마의 경우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한 여성이 한 번의 실수로 그런 상황에 처하고, 형량을 줄이기 위해 자수를 해서 어쨌거나 자발적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설정도 흥미롭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본 바로는- 감옥에 "적응해" 가는 그녀의 고군분투나,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 설정도 좀 더 미묘하고 복잡한 느낌.
뭐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굉장히 극적으로 그려지는, 경제적 사회적 하층 계급의 삶을 볼 때면, 그런 삶에 밀착하거나 다가가 보지 않은 나는 가끔 저런 삶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아, 실제로 그런 계층적 삶이 부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허구적 서사에서 그려지는 형태의 극적인 연쇄 같은 게 때로는 좀 설득력이 없게 느껴진다...고 하면 역시 나이브한 건가.), 혹은 저 글을 쓴 작가들은 과연 저런 삶을 제대로 알고 쓰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또 전철역이나 길에서 지나치는 홈리스들을 볼 때면 종종 내가 알고 살아가는 세상이란 이 세계 전체의 몇 퍼센트나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고. 그런데 이 중산층 여성은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이 그 삶의 나락으로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로 (물론 감옥생활을 한 것이 나름대로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어쨌든 출감 날짜가 정해져 있으니 마감기한이 있는 상태로 들어갔던 나락.) 그 삶의 편린들을 밀착해서 볼 수 있는 통로가 되었고,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는 능력도 있어 그걸 서사화할 수도 있었던 것. 결과적으로는 글의 형태로 나왔다곤 해도, 그녀 역시 그 역학 관계 안에 들어가서 관찰자이자 행위자로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애초에 기자라든가 작가, 혹은 학자의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일부러 자기 글의 '소재'로 삼기 위해 자신과는 거리가 있는 대상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그녀의 상황은 여러 모로 독특했던 것 같다.
또한, 감옥생활이라는 소재도 그렇고, 드라마의 초기 설정에서는 20대의 호기심으로 그랬다고 하는 주인공의 동성애 경험이, 동성들만 있는 감옥에 들어가서 생활하면서, 성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까지 나아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낼지 도 궁금하고. (이와 관련해서도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긴 하나, 혹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말하진 않겠음. 물론 인터넷 찾아보면 다 나오는 거긴 하지만. ㅋㅋ) 암튼 흥미로운 요소가 많은 드라마. 그리고 정극이라면 정극이지만, 적절한 유머와 코미디가 버무려진 점도 좋다. (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어떤 장르를 볼 수 있는 컨디션과 기간 같은 게 좀 있는 편인데, 지금은 너무 무거운 드라마 못 보는 기간. 그래서 <하니발> 시작해서 두 편 보고는 더 진도 못 빼고 있다. 그 드라마는 너무 무거워.) 다만 아시아인은 미미한 캐릭터로 한 명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나마도 여성인데 완전 김정일 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외모로 등장하는 어이없는 상황. 드라마에서 모든 인종을 공정하고 풍부하게 그려내길 기대할 순 없지만, 제대로 그릴 의도가 없으면 최소한 아예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될까 싶다.
암튼 지금까지 몇 편은 그래서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아, 부디 나의 지금 이 호평이 성급한 결론이 아니길 바랄 따름이다. 이미 내년 시즌 2 방영이 결정되었다고 하던데, 사실 시즌 1에서 좋았던 작품들이 시즌을 거듭할수록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과연 시즌2 방영이 좋은 선택이었을지는 정말 두고 볼 일. 근데 실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극적인 요소를 충실히 살리기보다 전형적으로 드라마적이라 여겨지는 자극적인 요소를 부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비틀어서 더 질질 끌고 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말하자면, 제목에 들어맞는 '생활' 공간으로서의 감옥을 더 보여주기 위해, 결국 주인공의 수감기간이 늘어나도록 하는 극적인 조처를 취하고, 여성들의 우정/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남자(특히, 약혼자)는 얼간이로 만들지 않겠는가 하는 예상. 게다가 이 드라마의 제작자가 <위즈 (Weeds)>라고 역시나 초반에는 신선하고 독특한 발상과 전개로 호평을 받다가 완전히 산으로 가 버려 사람들의 외면 속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드라마를 이미 한 번 만든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 더 그렇게 예상이 됨. 암튼 그런 점에서는 미국 드라마도, 좀 더 밀도있게 한 편 한 편을 만들어서 시리즈가 아주 짧게 가는 영국 BBC의 스타일을 어떤 드라마에서는 좀 차용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드라마는 분명 상당히 강한 장점들이 있지만, 미드 특유의 인물의 전형성이나 서사전개의 공식을 벗어나지 못한 명백한 취약점 또한 없지는 않다. 그리고 그 점은 분명 아쉬운 점. 이를 테면, 드라마에서는 감옥 바깥의 인간관계들, 즉 엄마, 절친, 약혼자를 둘러싼 행태나 관계는, 내가 드라마에서 기대(=예상)하는 방식 그대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굉장히 틀에 박힌 형태로 드라마에 항상 등장해 주시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중년여성인 엄마가 당연히 있고, 그나마도 그녀를 이해하고 사랑했던 인물들은 점점 파이퍼에게 소홀해지고 멀어져 가거나, 그녀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 걸로 나오고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에 내몰리면서 주인공이 너무도 뻔한 어떤 파국이나 극단적 선택으로 치달아 가겠구나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헌데 이와 대비해서 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 이 일을 겪은 주인공이 책을 쓰게 된 건 그곳에서의 생활을 일기로 기록을 해서가 아니라,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쓸 수 있는 자료는 어떤 식으로 정리를 했냐고, 일기를 썼는지 혹은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인 건지 질문을 받았을 때, 일기는 평소에도 거의 쓰지 않는 유형이라고 작가 본인이 답함.) 자기가 감옥에 있던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주변의 친구와 친지들과 주고 받은 무수한 편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사건의 당사자도 사진이 받았던 편지들을 물론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 두었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했두었던 걸 나중에 이 사람이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 모두들 자신이 받은 편지를 복사해서 보내준 덕분에 그걸 시간 순으로 정리해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물론 그게 1년 남짓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바깥에서도 그 끈을 놓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런 관계가 엄연히 존재했는데도, 꼭 그런 건 가지 쳐내고, 어떤 파국으로 피날레를 장식해야만 하는 자극적인 서사 전개 방식은 항상 의문의 대상.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보는 사람들의 따뜻함과 관심을 미묘하고 섬세하게 허구의 그릇에 담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건가 싶을 정도.
에고, 그렇긴 해도, 드라마가 이 정도만 되는 것도 어디냐 하고 감사하게 봐야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