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결코 부지런한 여행자가 아닌 내가 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계속 7시나 7시 반쯤에는 눈이 떠졌다. (절대 '눈을 뜨다'라는 능동형으로는 쓸 수 없는 기이한 현상. ㅎㅎ) 이날도 7시에 일어난 나는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호텔 바로 맞은편에 작은 카페가 있길래 가 봤는데 유기농 커피 메뉴가 있어서 시켜봤지만 맛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일단 커피를 후딱 마시고, 그날의 첫 일정으로 잡았던 산주산겐도( 三十三間堂)로 향하던 도중 카모가와 강가에 이태리 식당 겸 카페 같은 곳이 괜찮아 보여서 그곳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해서 나섰다.
산주산겐도는 1001구의 천수관음상과 28구의 수호신 상이 모셔진 서른 세 칸 짜리 법당이다. 그런데 본당맞은편 구조물 하나가 긴 복도식 구조인데 밝은 형광 주황빛으로 기둥이 칠해져 있어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종묘를 연상시키면서도, 색조가 다른 빛깔 때문에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런 공간에 벚꽃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모양새가 아련하니 어여뻤다. 그리고 법당에 들어가니 천수관음상이 줄지어 빼곡히 늘어서 있는 모습이 가히 장엄했다. (법당 내부는 촬영 금지.)
이어서 사람들이 그렇게나 교토에 오면 다 가 본다는데도 난 두 번을 가면서도 한 번도 들러보지 않았던 기요미즈데라( 淸水寺)를 의무감 때문에라도 좀 가야 할까 싶어서 일단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입구까지는 올라갔는데, 버글버글한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을 것 같은 그 사찰에서 아무리 훌륭한 전망과 기운이 있은들 그게 보이고 느껴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기요미즈데라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경할 수 있다는 니넨자카, 산넨자카라는 쇼핑 거리도 역시 사람이 많을 걸 생각하니 내키지 않아서, 비교적 조용한 골목을 찾아서 걸어내려 왔다. 오다가 어느 그릇에서 예쁜 그릇 몇 가지를 아주 싼 가격에 (2-300엔 정도) 내놓고 팔고 있는 듯해서 들어가 봤다. 매장 내 제품들은 비싸기도 하고 생각만큼 예쁘진 않아서, 밖에 진열되어 있던 작은 그릇 몇 개와, 있으면 꼭 하나쯤 사고 싶어하는 도자기 귀걸이가 예쁘길래 하나 골랐다. 그러면서 점원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는데, 포장하면서 "그릇을 상자에 담아 드릴까요?"라고 묻는 말을 갑자기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제가 일본어가 좀 서툴어서, 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더니, 그분이 일본인인 줄 알았다며, 발음이 좋다고 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ㅎ
매장을 나서서 주변을 둘러 보며 내려오다 보니 다음 목적지로 정했던 난젠지(南仙寺) 행 버스를 탈 정류장에 다다랐다. 내려서 걸어갈 수도 있긴 했지만, 어차피 버스 1일권이 있으니 환승을 하기 위해 가던 차에 강가의 노천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으로 편의점 샌드위치 하나밖에 안 먹은 데다, 시간도 보아하니 12시 즈음이라 허기가 좀 느껴져서 그쪽으로 가 보니, 거긴 교토국립근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Kyoto) 내에 위치한 카페였다. 그런데 마침 메이지 시대 150년 기념 특별전을 하는 중이었는데, 전시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뭔가 재미있어 보였다. 그래서 입장권을 끊어 들어가서, 우선 허기부터 달래러 일단 카페로 먼저 향했다. 마침 런치 세트인 카레 우동 정식 메뉴가 값도 싸고 맛있어 보여 먹었더니 과연 썩 괜찮았다. (일본은 정말 런치 세트가 알짜배기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허기도 어느 정도 달래졌고, 3층으로 올라가 천천히 전시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근대화의 여파에 전통적인 공예나 예술 형식들이 하향세로 기울어가던 시절, 거꾸로 그것을 정교한 디자인의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켰다는 메이지 시대의 다양한 일본 공예품들과 그림 등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많은 장인들이 우리가 일본하면 떠올리는 일본의 전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나 부러웠다. 여러 작품들 가운데 나는 다케우치 세이호라는 화가가 수묵화로 그린 "비(雨)"라는 작품이 무척 좋았다. 수묵화의 느낌이 보통 그렇긴 하지만, 빗줄기 하나 그리지 않은 채로 여백이 풍부한 화폭 위에 버드나무가 빗줄기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모습으로 비를 표현한 그 작품이 참으로 좋아 몇 번을 되돌아가 보고 나서야 전시장을 나섰다. 나와서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 같은 거라도 살 수 있을까 하고 봤는데 없었고, 도록의 질도 썩 훌륭하지 않아 작품 관련 상품을 사올 수 없었던 것이 아쉬었다.
미술관을 나와서 다음 행선지인 난젠지 방면 버스를 미술관 바로 앞에 위치한 정류장에서 탔다. 메이지 신궁이 미술관에서 거의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긴 했지만 들러 보지 않았다. 불교 사찰에 가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신사 혹은 신궁을 간다는 건 왠지 한국인에게는 정치, 문화, 역사적 함의가 너무 무겁고, 어쩐지 올바르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신사는, 특히 입장료가 있을 경우엔, 웬만해선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난젠지는 마치 거인국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대문도, 석등도 거대했고, 건물도 큼직큼직했다. 게다가 다른 절들보다도 꼭 여길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것은 경내에 있던 수로각. 전근대 건축물 옆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근대적 구조물의 대비가 묘하게 조화로웠다. 절의 대문 격인 산몬(三門)에는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2층 전망대도 있었지만, 다음에 친구들과 함께 할 것을 남겨 두기 위해 전망대 입장은 유보했다. 절을 구석구석 둘러 보고 유료 입장이 가능한 호조정원에 가 볼까 생각하던 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왠지 빗속을 걷는 것이 별로 엄두가 나지도 않고,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앉아 있지 못했더니, 발바닥도 아프고 해서, 우산이 없는 몇몇 다른 관광객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산몬의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구경했다. 동아시아 건축물들은 비오는 날 처마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운치 있고, 유난히 아름다워 보여서 그런 날에 가면 더 좋아하는 편이라, 조용히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아웃도어용 접이식 방석을 갖고 갔던 것이 돌바닥에 앉을 때 상당히 요긴 했고, 테이크아웃했던 따뜻한 커피도 거기서 살짝 꺼내서 홀짝홀짝 마시며 그 순간을 만끽했다.
교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기요미즈데라보다 난젠지가 더 좋았던 또 한 가지 점은 니넨자카, 산넨자카 같은 어수선한 거리와는 달리, 난젠지까지 이르는 주택가의 집들과 정원마저도 마치 거대한 예술 작품의 일부인 양 고요하고 아름다웠다는 점이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 들러서 쉬었다 갈까 했던 나는, 내가 타려 했던 버스의 경우, 세 대에 한 대 꼴로, 내가 묵는 호텔 앞을 지나는 직진 경로 대신 우회를 해서 교토 역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탓에, 숙소에서 몇 블럭쯤 떨어진 번화가에서 내려야 했다. 원래는 숙소에서 좀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던 계획을 불가피하게 수정해서, 본의 아니게, 니시키 시장 구경도 하고, 거리를 헤매 다니며 걷다가, 비도 추적대고 오는 날씨에 적당한 것 같아 라면집에 들어갔다. 메뉴 선택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차라리 그 근처 백화점 푸드코트에 가서 먹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내가 먹은 라면은 가격에 비해 별로 맛있진 않아서 아쉬웠다.
어쨌든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서 팟캐스트를 들으며 혼술을 하며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 근데 이날 진짜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걸어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행이야,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다음날부터는 좀 쉬엄쉬엄 다녀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ㅎㅎ 그리고 이 여행기, 흐름 한 번 끊기면 그 길로 안 쓰게 될 것 같아서, 쉴 틈 없이 몰아쳐서 쓰고 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