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의 셋째 날. 다음 날 점심 무렵에 교토를 떠나야 하는 나에게 사실상 교토에서의 제대로 된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생일이기도 했던 나는 그날만큼은 교토에서의 지난 이틀마냥 맛없는 밥을 먹지 않기를 바라며 호텔을 나섰다. 내 기준으로는 실패했던 전 날의 카페 대신, 오늘은 그 옆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라운지 겸 카페에서 아침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커피 맛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편안하면서도 쾌적한 게스트하우스라는 그 공간 자체에 관심이 생겼다. 도미토리 형태가 아닌 개인 객실이 있다면 다음 기회에 한번 묵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교토 내에서 숙소를 옮겨야 하는 날이었기에 체크아웃을 한 뒤 짐을 호텔에 맡기고 번호표를 받았다. 다음 숙소의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좀 떠서 짐을 어찌 해야 할까 걱정을 좀 했었는데, 에어비앤비나 작은 규모의 호텔들보다 이런 대규모 호텔 체인을 이용하면 확실히 이런 부분의 서비스에 큰 강점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목적지는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인 "교토부립 도판 명화의 정원"(Garden of Fine Art, Kyoto)이었다. 이곳은 10년 전에 다른 친구들과 교토에 왔을 때, 건축에 관심이 많은 한 친구가 가고 싶다고 해서 찾아갔던 곳인데, 구조나 발상이 재미있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곳이었다. 전날 밤까지 왔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하는 아침에 조용히 산책 삼아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았다. 교토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곳도 호텔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30분 정도 걸려 기타야마 역에서 내렸고, 건널목 하나를 건너서 우회전해 조금 올라가니 바로 명화의 정원이 나왔다. 내가 입장권 한 장 달라고 하니, 매표원이 갑자기 식물원에 온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벙했다가, 명화의 정원에 온 거라고 했고, 표를 받아서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지역까지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명화의 정원이 아닌 식물원에 오는데, 아마 간혹 실수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심지어 환불을 요구했을지도??? 사실 슥 한번 훑는 데는 10분도 안 걸릴 정도의 규모와 볼거리라 입장권은 100엔밖에 안 해서 정말 싸긴 하지만.)
교토에 가는 몇몇 친구들에게 보통의 교토 관광지와는 달라서 한번쯤 가 볼 만하다고 추천한 적 있는데, 평은 반반이었다. 그곳의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한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발상은 나쁘지 않은 듯한데 뭔가 기묘했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고. 그래도 나는 야외를 산책하면서 건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그 공간에 대한 인상이 좋게 남아 있어서 다시 가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아침 첫 행선지로 딱 좋았던 것 같다. (다 좋았는데 물에서 냄새가 좀 나던 것이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었다.)
은각사에서처럼 이곳도 두 번을 천천히 돌아본 뒤 나왔다. 다음 행선지로 정해둔 케이분샤 (서점) 이치조지점을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빵집 겸 델리가 있어서, 들러서 뭐라도 먹고 갈까 했는데, 그러다 보면 계획해 둔 다음 일정이 어그러질 것도 같아서 그냥 버스를 탔다. 케이분샤는 가디언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서점을 꼽을 때 포함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The Guardian - Top shelves 기사 링크)
일반적인 관광책자를 포함해, 에세이류의 여행기에서도 교토에서 가 볼 만한 곳으로 추천한 이 서점에 가기야 가면서도, 아마 관광객들이 몰려 가는 그런 곳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좀 했었다. 심지어 내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그 서점에 들어서면 주변 상가나 이웃 분들께 이 서점을 찾아오는 길을 묻지 말아달라,는 류의 문구가 적혀 있더라고도 하길래, 그럴 만큼 관광객들이 기웃거리는 그런 곳인가,라는 생각이 더 들기조차 했었다. 그럼에도 내 눈으로 일단 확인은 해 보고 싶은 생각에 갔다.
그런데 괜한 기우였다. 서점은 대형 서점처럼 아주 크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에서 최근에 많이 생겨난 독립 서점과 비교하면 꽤 규모가 있는 서점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목조 건물의 느낌이 많이 나는 구조에 벽면으로 붙은 책장 외에도 가운데에 이런저런 매대 형태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도, 뭔가 어수선한 느낌 대신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리고 시간대가 그랬던 건지, 날짜가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관광객임을 의심케 하는 (본인 제외) 사람들은커녕,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이든 어르신부터 힙한 옷차림의 젊은이까지, 뭔가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찾아오는 동네 서점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서점 양 옆으로, 한쪽에는 작은 전시 공간 겸 문구류를 판매하는 매장과, 다른 한쪽에는 그릇 등의 주방 용품과 직물 관련 제품 등의 생활 용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분리된 듯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역시나 서점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그런 공간들이었다.
어차피 일본어 책은 제대로 읽을 수도 없기도 하고, 일본 책이 비싸기도 해서, 책 사는 건 그냥 포기하고, 서점 에코백을 포함한 몇 가지 기념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생활 용품 매장에서 샀다.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아주 살짝 여기서 사진 찍는 건 안 되겠죠? 라고 물었더니, 원래 안 되지만 한 장 정도라면... 이라고 하길래, 그럼 딱 한 장만 찍겠다고 하고, 구도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후다닥 한 장만 찍었다.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만 안 났더라면 어떻게 더 찍을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ㅠ.ㅠ)
서점을 나서니 얼추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점이 너무 좋아서, 점심을 먹고 다시 와볼까 하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선뜻 들어가겠다 싶은 곳이 눈에 띄진 않아서, 원래 생각했던 함박스테이크 집으로 가기로 했다. 버스틀 타고 걸어서 "봉쥬르"라는 작은 경양식 집으로 갔다. 여행 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동네 사람들이 가는 작은 맛집이라고 추천된 곳이길래 가 보겠다 생각했다. 나야 혼자 갔으니 바 쪽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는데, 안쪽으로 테이블이 너댓 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으러 온 직장인 같은 사람도, 동네 마실 삼아 함께 온 할머니들도 계신 정겨운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남편 분이 요리를 담당하고, 아내 분이 서빙을 하고 있고, 바에 앉아 요리하는 모습을 다 볼 수 있었다. 함박 스테이크는 엄청난 맛집의 맛이라기보다 정말 동네에 하나 있다면 편하게 들러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맛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급히 검색해 보니,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숍 중 하나인 이노다 커피 본점이 식당에서 과히 멀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 얼른 걸어서 갔다. 그랬더니 마치 마치 2,30년대 경성에도 아마 있었을 법 한 곳이지 않을까 싶은 인테리어가 남아있는 2층의 커피숍이었다. 계란샌드위치도 추천 메뉴 중 하나였는데, 이미 점심을 먹고 와서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물어보니 테이크아웃도 된다길래, 카페에서 마시고 갈 아이스 카페라떼와 함께 테이크아웃으로 계란샌드위치를 같이 주문했다. 다음으로 들르고 싶었던 사찰인 토지(東寺)의 입장 마감 시간과 이동 시간, 그리고 전날 숙소에서 짐을 찾아 오늘 체크인할 숙소까지 들어갈 시간 등을 고려했을 때, 아주 여유있게 커피를 마실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원하고 부드러운 커피를 짧게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교토 역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위치인 데다, 담장 너머에서까지 보이는 높다란 오층탑이 상징적인 토지는 교토 시내의 대표적인 관광지라 할 수 있었다. 입장을 하려고 보니, 경내의 정원과 법당 내부만 둘러보는 일반 입장권은 500엔인데, 현재 진행 중인 부설 박물관의 특별전과 옆에 있는 칸지인이라는 정원까지 같이 둘러볼 경우 1000엔이라고 했다. 그 전날 난젠지에서 호조정원을 들러보고 싶다가 비도 오고, 발도 아프고 해서 못 다녀 온 점이 아쉽기도 해서 정원을 볼 수 있다길래 후자가 좀 구미에 당기긴 했다. 당시 시간이 3시 20분이었는데, 대부분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5시에 문을 닫지만, 실제적인 입장 마감 시간은 4시 반인지라, 표를 구매하면서 시간이 괜찮을 것 같냐고 매표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1000엔 입장권을 끊었다. 5층 탑과 경내의 법당을 둘러본 뒤, 박물관에 들렀다가 마지막으로 칸지인으로 갔는데, 역시 포함시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건물 내부를 돌면서 서로 다른 방에서 정원을 보고, 또 다도실 등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한국의 전통 정원과는 다른 정교하게 꾸며놓은 일본 특유의 정원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4시 반쯤 토지의 칸지인에서 나와 경로를 검색해 보니, 체크인할 호텔이 토지에서 많이 멀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체크아웃할 호텔까지 바로 가는 버스도 있어서, 나는 아예 체크인을 먼저 하고 아침에 메고 나갔던 배낭과 자잘한 짐을 내려놓은 뒤, 다른 짐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 새로 옮긴 호텔은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라는 절에서 한 블럭 안쪽 골목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가 보니 4층 연립 주택이었던 곳을 소규모 호텔로 개조한 곳인 듯했다. 나는 바닥에 자는 것이 싫지 않아 다다미방을 예약했는데, 침대가 있는 방들도 있다. 아마도 침대가 있는 객실들이 좀 더 높은 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점은 교토 주택가의 조용하고도 평범한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오픈한 지 얼마되지 않은 듯이 실내가 아주 깨끗하다는 점이었고, 단점이라고 한다면, 정해진 체크인 마감 시간인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는 프론트에 사람이 아예 없다고 하는 점이었다. 아마도 밤 늦게 도착해서 체크인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숙소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체크인을 마치고, 전날의 숙소에 가서 짐을 찾아 버스틀 타고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에 보니 숙소에서 멀지 않은 큰길가에 편의점이 있어 짐을 내려놓고 거기 가서 뭘 좀 사들고 들어가면 될 듯했다. 숙소에서 나와서 일단 저녁 식사를 하고 편의점에 들를 요량으로 골목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생각 외로 프랑스 식당이며 일식당이며 다양한 식당들도 있었고, 전통 여관이나 게스트 하우스 등도 눈에 띄었다. 길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도 몇몇 마주쳐서, 나는 잘 몰랐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숙박지역인 것도 같았다. 그러다 생면으로 하는 전통있는 소바 집이 보여서 들어갔다. 추천 소바를 시켜 보니 새우며 버섯이며 여러 가지 재료가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면 색깔이 초록색이었다. 뭘 넣은 건가 궁금하긴 했는데 물어보지는 못했다. 휴대폰과 보조배터리가 모두 방전된 상태라 방에 충전을 시켜놓고 나오느라 휴대폰이 없어서 사진도 찍지 못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에 들렀다 방에 들어갔다. 다음 날 10시 체크아웃이었는데, 혹시라도 좀 늦게 일어나더라도 바로 체크아웃할 수 있도록 웬만한 짐은 다 싸 놓았다. 그리고 맥주 한 캔에 곁들여, 아껴두었던 <필름클럽> 팟캐스트 신규 에피소드를 들으며 그렇게 교토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