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도쿄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인 날. 내가 탈 도쿄 행 신칸센은 1시 8분 출발이었으니, 교토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점심 식사를 하고, 도쿄로 가면 됐다. 교토 시내 관광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짐은 교토역 코인락커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래놓고 대부분 9시 경우에 따라서는 10시에나 문 여는 관광지들을 들렀다가 1시 전에 다시 교토 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왠지 촉박하게 느껴졌다. 신칸센을 절대로 놓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는 상황에서, 돌발 변수가 생기는 일은 피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교토 역 이세탄 백화점에 대형 문구점인 이토야 분점이 있다길래, 거기나 들렀다가 점심 먹고, 기차를 타러 가면 제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하고, 전날 샀던 이노다 커피의 계란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고 출발했다. (그런데 싸구려 입맛인 탓인지 여행 내내 아침으로 사 먹었던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에그샌드위치가 이것보다 더 맛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일본에 도착했던 첫날 교토역에서 만난 친구는 역에 도착한 후, 개찰구를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 내에서 빈 코인락커를 찾느라 고생을 좀 했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교토 역 하치조 서쪽 출입구 바깥쪽에서 무더기로 비어 있는 코인락커를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제일 크고 비싼 700엔짜리 칸에 넣으려고 했는데, 막상 요령껏 넣어 보니 500엔짜리에도 잘 들어가서 그걸로 골라 잡았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있었으니, 코인락커에 100엔짜리 동전만 투입 가능한 것이었다. 100엔 동전이 부족했던 나는 그래서 동전 교환기를 찾아갔는데, 막상 또 가 보니 나한텐 500엔짜리 동전과 2000엔짜리 지폐만 있었는데, 이 기계에는 1000엔 지폐 투입만 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았지만, 교환기에는 주변 상점에 가서 잔돈 바꿔 달라고 요청하지 말라는 문구까지도 적혀 있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찰나, 웬 점잖게 생긴 중년의 서양인 남자분이 그 옆의 기계에서 동전을 바꾼 뒤, 바로 인접해 있는 코인락커에서 가방을 넣고 있다. 너무나 절박한 나머지 나는 조심스럽게 영어로 "실례합니다. 실은 저한테 500엔짜리 동전밖에 없어서 그런데, 혹시 100엔짜리로 좀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너무도 상냥하게, 당연하다고 하면서 동전을 꿔 주시면서, 심지어 한번 더 잘 세 보세요,라고 까지 덧붙이셨다. 아- 귀인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바꾼 동전으로 코인락커에 가방을 무사히 넣고, 위치가 헷갈릴세라, 코인 락커 사진은 물론 앞에 보이는 상점도 사진으로 찍어둔 뒤 이동했다.
내가 이 모든 걸 마친 것은 9시 반쯤. 이세탄 백화점은 10시에 문을 여는 터라 커피를 한 잔 마셔볼까 하고 역사며 역에 붙어있는 호텔까지 돌아보았지만, 미스터도넛 커피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도 않는데 줄마저 길었고, 호텔 라운지 커피는 진짜 보통 커피의 두 배 가격이라 영 마땅치 않았다. 결국 대충 걸어다니며 시간을 때우고 백화점이 문을 열자마자 10층 이토야에 갔다. 그런데 기대했던 정도 규모의 매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쁜 카드를 몇 가지 주워 담았더니, 면세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인 5천 엔을 넘길 정도였다. 3층 면세 카운터에 가서 면세 금액을 돌려 받은 뒤, 인터넷에서 검색해 두었던 오믈렛 집에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메뉴 실패. 런치 세트를 시켰는데, 너무 맛없었다. 정말 교토에서 마지막 점심을 그렇게까지 처참히 실패할 줄은 몰랐다.
식사를 마치고 11시 40분쯤 나와서 점심으로 버린 입맛을 커피로 만회해 볼까 하고 처음에는 구글 평점이 꽤 좋은 쿠라스(Kurasu)라는 카페를 가 보려 했으나, 좀 먼 것 같아 포기. 그래서 역사와 연결된 곳에 있다는 오가와 커피와 이노다 커피를 찾았는데, 구글맵을 내가 보는 방법을 제대로 못 익혀서인가, 지하 몇 층인지 제대로 몰라서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전날 마셔 본 이노다 커피 매장 한 군데를 찾을 수 있었고, 카페라떼 한 잔을 내 텀블러에 테이크아웃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신칸센 개찰구로 가는 길에 오가와 커피가 보였다. 따로 거래하는 커피 농장이 없는 교토의 커피점들이 그곳 커피를 갖다 쓰는 경우가 많다는데 어떨까,하는 궁금한 마음에, 테이크아웃하면 할인을 해준다는 제일 작은 사이즈의 기본 커피를 종이컵에 테이크아웃해서 코인락커까지 가면서 마셨다.
코인락커에서 가방을 찾아온 뒤 내가 탈 코다마 열차의 승강장 번호를 확인한 뒤, 역무원에게 프랏토 코다마 표를 보여주고 개찰구로 들어갔다. (일반 열차표는 개찰구에 투입하면 문이 열리고, 나와서 표를 받을 수 있는 형식이지만, 이 표는 역무원에게 보여줘서 확인을 받은 뒤에 들어갈 수 있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찰구로 들어가서도 전광판을 통해 승강장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미리 들어가서 열차에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 에키벤 매장을 좀 천천히 둘러보고 나서 사 갔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에키벤 매장을 제대로 찾지 못했었는데, 화장실을 들렀다가 나오다 보니 보였지만, 이미 구입하려는 사람들 줄은 너무 길고, 나는 시간이 촉박해서 그곳에서 도시락을 사진 못했다. 대신 승강장으로 올라가서 프랏토 코다마 티켓을 끊으면 제공하는, 역사 내의 지정된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음료 교환권으로 술을 한 캔 샀다. 그러고 나서 내가 탈 거의 끝쪽 칸으로 이동하고 보니, 그 쪽에 있는 편의점에서도 도시락을 팔고 있긴 했다. 열차 시간이 10분도 채 안 남아서 마음이 바쁘기도 했고, 오믈렛이 망한 데 대한 오기였던가, 눈에 띄는 대로 후다닥 집어든 것이 계란말이와 불고기 같은 것이 얹혀 있는 도시락.
어찌 됐든 도시락을 사서 1시 8분 열차에 올라 내 좌석에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 공항에서 교토로 오는 하루카 열차는 많지는 않았어도 여행가방을 놓을 수 있는 곳이 열차 칸의 앞뒤쪽 공간에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내가 탄 열차 칸에 없었던 것인지, 내가 찾지 못한 것인지, 일단 좌석으로 끌로 왔다. 옆 자리가 비어있어서 우선 나의 커다란 여행가방을 옆자리 쪽에 놓긴 했는데, 혹시나 누가 타면 짐을 어디로 옮겨둬야 할지 좀 걱정스럽긴 했다. 어쨌든 편하고 쾌적한 기차에서의 행복한 3시간 반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깥을 구경하며 휴대폰으로 타임랩스 비디오도 찍고, 눈에 띄는 대로 풍경 사진도 찍으면서 지루한 줄 몰랐다.
물론 여권이나 지갑 등 가장 큰 귀중품이 든 가방은 항상 따로 메고 움직이긴 했지만, 화장실을 갈 때도 짐가방을 자리에 두고 가면서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정말 편했다. 이게 만약 유럽의 기차였더라면, 일행 없이 이렇게 이동하면서 화장실 한번도 편하게 다녀올 수 없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인 데다, 아시아인인 처지에 유럽에서 홀로 여행객이 되면, 소매치기나 도난 사고를 당할 우려 같은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물론 그런 일이 없는 곳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대단히 상식적인 선에서 분실물 습득 등이 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점, 그리고 내가 외형으로서는 외국인이라는 것이 바로 눈에 띄지 않는 조건이 참으로 편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일이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쉽게 배제의 원리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니까.
작년 도쿄 여행 중 도쿄 역에서 나리타 공항행 버스를 타기 위해 도쿄 역을 한번 이용해 보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로 인해 길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던 나는 최종목적지인 도쿄 역 대신 그 전 정차역인 시나가와에서 내리기로 했다. 어차피 환승해야 하는 JR 야마노테선이 지나가는 역이기도 하거니와, 마찬가지로 지난 번 여행에서 시나가와 역 바로 앞 호텔에서 묵었던 덕분에 역이 어느 정도 익숙하기도 했다.
4시 39분에 시나가와 역에서 하차해서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개찰구로 가서 프랏토 코다마 표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출발역에서는 눈으로 행선지 확인만 했던 표를 도착역에서는 절취선이 있는 부분을 떼어서 역무원이 수거해 갔다.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어 놓은 것이 아쉽다.) 그리고 환승할 것인지 묻고, 그러다고 하니 IC 카드가 있냐고 물었다. 예전에는 간사이와 간토 지방에서 사용하는 IC 카드가 호환이 안 되었다고 하던데, 다행히 이제는 모두 호환이 돼서, 교토에서 산 이코카 카드를 내미니, 역무원이 개찰 처리를 해 주신 뒤 카드를 돌려줬다. 카드를 받아들고 야마노테선 승강장으로 갔다. 전날 도쿄에 도착한 친구는 자기 숙소가 있는 역과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도쿄 역에서 내렸다는데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고 했는데, 시나가와 역은 개찰과 환승 절차가 너무도 수월해서, 친구에게 다음에 또 이렇게 이동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 경로를 이용하라고 알려주었다.
10분 만에 에비수역 도착하니 시간은 4시 55분. 예약한 에어비앤비가 다이칸야마 역에서는 걸어서 5분이 좀 넘는 가까운 거리지만, 에비수에서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라고 했는데, 심지어 오르막길도 있다고 되어 있었다. 짐이 무거워서 20분을 걸을 엄두가 좀 안 나서, 꼼수를 써서 버스를 타 보려고 했는데, 내가 원하던 숙소 근처까지 가는 마을 버스 같은 노선은 끝내 승강장을 못 찾아서 못 타고, 대신 다른 버스틀 탔는데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곳이 겨우 한 정거장 거리였고, 그러고도 걷기는 역시 10분 이상 걸어야 해서, 결과적으로 괜한 짓이었다.
어쨌거나 5시 반에는 숙소에 도착했다. 일종의 아파트 건물에 위치해 있다는 이 에어비앤비는 건물 현관 열쇠와 해당 호실 현관 열쇠 각각 두 개의 열쇠가 필요했다. 그런데 6시 이후에 도착할 경우에는 아파트 현관문이 잠겨 버려서 그 현관 열쇠를 받는 별도의 설명을 해 줬는데, 일본어는 완전히 이해가 안 되고, 적어놓은 영문은 약간 어설퍼서 그건 그것대로 헷갈려서 무조건 6시까지 도착하는 게 목표였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교토에서 좀 더 늦게 출발해도 됐었는데, 그 현관문 열쇠를 제대로 찾지 못해서 행여나 숙소에 들어가지 못할 일을 생각하니 너무 걱정이 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간 계속된 일식, 심지어 몇 차례의 실패와, 가장 결정적으로 직전 점심에서 심한 실패를 맛본 후유증으로 나는 이날 저녁만은 일식도 먹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식당에 가서 혼자 밥 먹는 사람으로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내가 숙소를 잡은 다이칸야마 지역이 다소 힙한 분위기의 동네라 젊은 입맛에 맞는 식당들이 많은 지역이었는데, 찾아 보니 가까운 거리에 수제 버거가 유명한 집이 있었다. 게다가 원래 좌석이 네 개밖에 되지 않아서 테이크아웃을 많이 해가는 곳이라고 하길래, 쾌재를 부르며 그곳에 가서 저녁거리를 사 왔다.
며칠 째 시달리던 외국어와 나홀로 이방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맛난 버거에 맥주 한 잔을 곁들여, 숙소에 앉아 편하게 식사를 하니 그렇게나 행복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