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엔 도착해서 저녁 먹은 것 말고는 한 게 없어서 사실상 도쿄에서 첫 날의 시작. 이날은 엄마 심부름 삼아 백화점에 가는 게 주요 일정. 지난 번 여행에서도 백화점을 세 군데 쯤 돌고, 심지어 환불까지 하러 가야 했던 기억이 있어서 (환불하려다 다행히 교환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하루만 딱 잡아서 백화점을 가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 시간을 유예하기 위해 오전엔 산책 삼아 숙소에서 멀지 않은 강가의 공원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아침은 전날 교토역 편의점에서 샀던 도시락을 먹고, 10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가다 보니 괜찮아 보이는 커피점이 있었는데, 조조할인을 해주는 메뉴가 있어서 그걸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나카메구로 강을 따라 슬슬 걸어서 공원까지 갔다. 사실 말이 강이고, 딱 청계천 정도의 폭인데, 이 강가 역시 도쿄에서는 벚꽃 구경을 하러 많이들 오는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서울로 치면 여의도의 윤중로 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 강 사이로 놓인 다리에서 보니 과연 꽃은 다 지고 없었지만, 벚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었다. 두 주 정도 전에 왔더라면 벚꽃 구경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공원에 가 보니,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꽃도 다양하게 심어져 있고,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고, 벤치나 잔디밭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각자의 개들을 데리고 여럿이 함께 산책을 나온 무리도 있고, 심지어 윗옷을 벗고 태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양에서 보면 그러려니 하는 건데도, 막상 동양의 도시에서 보니, 좀 낯설긴 했다. ㅎ 그늘 아래 벤치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신 뒤, 전철역으로 향했다.
엄마가 요청한 아이템은 가방과 넥워머 두 가지였는데, 같은 디자이너의 제품이긴 하지만, 하필 또 매장은 각각인데, 백화점마다 가방 브랜드는 입점돼 있는데, 스카프 브랜드는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해서, 결국 오후 4시 반까지 신주쿠와 시부야에 있는 백화점 세 군데, 총 여섯 군데의 매장을 돌아야 했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이날은 교토에서 만났던 친구와 저녁을 먹기로 해서 친구와 긴자에서 보기로 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휴대폰과 보조 배터리가 모두 이미 방전 상태였다. 안 그러면 곧장 긴자로 가면 됐지만 어쩔 수 없이 집에 들러서 충전을 하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시부야의 백화점에서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위치였다는 정도였다.
6시 반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나는 5시 50분에 숙소를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얼핏 내 뒤로 웬 젊은 한국인 여배우가 보였다. 설마 싶어서 길을 건너면서 한번 더 슬쩍 뒤돌아 보니 맞는 터라, 친구들에게 실시간으로 괜히 문자를 보내면서 전철역에 도착했다. 실은 긴자역에도 매장이 하나 있긴 해서 가 봤더니, 다행히 가방과 넥워머가 1층과 3층 매장에 다 있었다. 다행히도 친구가 약간 늦게 도착하고, 지하1층 면세카운터에서 먼저 줄 서서 기다려 준대서, 쇼핑을 마치고 가서 면세 금액도 돌려받고 백화점을 나섰다. (저녁 먹고 숙소 들어가 사진을 찍어 보내 보니, 워머가 엄마가 원한 사이즈가 아니라고 해서, 또 한바탕 환불 위기가 있었는데, 그냥 잊어버리고 편하게 놀러 다니라고 하셔서 그냥 그러기로 했다.)
친구가 속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따뜻한 소바를 먹기로 했었는데, 친구가 검색해 뒀던 첫 번째 집은 자리가 없다고 해서 허탕을 쳤다. 그나마 그집에 들어서자마자 담배연기가 확 나서, 우리 둘 다 어차피 오래 못 있었을 거야,라며 위안 삼고 나섰다. 바로 다시 검색을 해 보니, 10분 정도 걸으면 한 군데가 더 있어서 그리로 이동했다. 처음에 간판이 잘 안 보여서 헤맸는데, 2층에 매장이 있는데, 심지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다른 건물 뒤로 돌아서 올라가야 하는 난해한 위치였다. 들어서 보니, 직장인들과 현지인인 것 같은 사람들이 편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분위기에, 금방 허탕친 곳보다 밝고 쾌적해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일본에서 소바는 간혹 양념이 내 입맛엔 너무 짜기도 한데, 이곳은 그렇지 않아서 맛있게 잘 먹었다. 게다가 에비수 생맥주도 팔고 있었는데, 그것도 맛있었다. 백화점에서 헛되이 발품 팔며 쌓였던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친구가 그날도 역시 다른 원고 마무리할 것이 있다고 해서, 길게는 함께 있지 못 하고, 전철역까지 함께 걸어가서 헤어졌다.
오전에 공원에 잠깐 가서 앉아 있다가, 하루종일 백화점 다니다 친구랑 저녁 먹은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지만, 어느 새 도쿄에서의 이틀 밤이 저물었다. 다음 날은 다시 숙소를 옮겨야 하는 날. 다행히 일찍부터 짐을 맡겨 놓을 수 있어서, 아침에 가급적 일찍 체크아웃해서 숙소로 가기로 하고, 필요한 것 몇 가지만 빼고 짐을 다 싸 놓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