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이병우 이야기를 빙자한 나의 새내기 시절에 관한 장광설- (^^;)
이병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의 대학 새내기 시절 이야기를 조금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시절의 한 지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병우와 "나와의" 첫 만남 (축자적인 의미의 "만남"은 아니고...)을 이야기 할 도리가 없으므로.
이병우를 처음 접한 것은 학부 새내기 때였던 1997년 4월.
비교적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성향이 많았던 나는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새내기들을 매혹했던 동아리 활동에 불편함을 느끼고,
동아리 대신 과 학회 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국문학도로서의 부푼 꿈을 안고 대학이라는 곳에 발을 들였던 나에게는
본격적으로 국어와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에 대해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선배와 동기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한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yes, yes, call me a geek-. why else would I be in a grad school?)
그래서 주로 활동했던 곳은 "국어학 모임"과 "고전문학반"
이름들도 참... 은유의 묘미라든가 하는 것 하나 없이 참 적나라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한글 어휘의 어원이나 역사를 밝히는 데
관심이 무척 많았고 국어학이라면 그런 공부를 하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국어학 전체의 연구분야가 아니라 국어학의 한 분야라는 것과
그 공부를 위해 요구되는 국어학 제반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광범하면서도 세밀한 것인지,
그리고 나에게 있어 국어학이 국문학보다는 과학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3때 한창 신경숙, 윤대녕, 김소진 같은 현대 작가들의 글을 읽거나
서영채 선생님 같은 이의 평론을 접한 후,
"문학평론"이 나의 길이야,라고 생각했던 그 당시에조차도
나는 여전히 국어학과 한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품고
그것 역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조금은 뜬금없는 "국어학 모임"이었다.
그런데 대학 시절 내가 한 몇 안 되는 일들을 돌이켜
한 점 후회가 없는 것이 바로 그 학회에 들어간 것이다.
그 학회는 국문과 내에서도 "국어학" 분야의 전통이 강한 우리 학교에서
학부제가 실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도 높은 학회활동과 학회원들의 강한 팀웍을 자랑하는
국문과 내 대표 학회 가운데 하나였다(...라고 나는 알고 있다^^;)
학부제 이후로는 문화적인 영역에 대한 학회나 동아리 활동은 여전히 왕성했지만
특정 학문 분과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한 학회들은
대부분 사그라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학회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난 억세게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내가 입학한 해에 당시의 97학번 새내기인 나에게는 하늘과도 같았던
91학번 국문과 선배들이 의기투합을 해서 학회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그 때 나를 비롯해 5명의 새내기가 그 선배들의 광고에 답해
첫 모임에 나갔던 것 같다.
이미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있거나 학부의 막바지에 있던 이 선배들은
당연히 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지식과 열정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 커리를 짜고, 간사로 들어와 함께 세미나를 했다.
당시에 내가 읽었던 것들은 촘스키니 비트겐슈타인이니, 라캉이니 하는
지금의 내가 들어도 헉- 소리가 나는 철학자나 언어학자들의 책이었다.
그 때는 멋 모르니 읽었지, 지금 읽으라고 했다면
아마도 겉멋만 잔뜩 들어 어디서 이름은 들어봐 가지고,
그 이름의 권위에 눌려 엄두도 못 냈을지 모르겠다.
암튼 일주일에 한 번 모이면, 거의 서너시간씩 이어지던 강도높은 세미나에
선배들도 나름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셨던 듯,
진빠지게 세미나를 하고 나면 전통찻집이나 소박한 소주집 같은 데서
조촐하면서도 즐거운 뒷풀이가 이어졌다.
그렇게 함께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쌓인 정이 꽤나 돈독했는데,
때마침 학회원들 전체 중에 -아마도- 내 생일 맨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모두들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생일 파티도 해 주고,
심지어 선물도 주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이 바로 이병우의 4집 앨범 "야간비행"이었다.
그런데 이 음반을 선물한 선배는 사실 뭘 사야할지 잘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병우를 아주 오랫동안 (어떤 날, 시절부터) 좋아했던 같은 학회 선배가
그 앨범이 이병우의 최근 앨범이라며 추천을 해서 사줬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작 그의 앨범을 추천한 선배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라는
도정일 선생님의 평론집을 선물로 줬었다.)
그래서 선물을 했던 선배 자신은 그 음반에 대해서도 잘 아는 바가 없다고 했고,
선물을 추천한 선배가 이병우에 대해 나에게 자세히 소개해줬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 카세트에 넣어 처음으로 들었던 이병우의 음악.
아마도 내가 이병우의 음악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인 첫번째 이유는
그 음악을 소개해준 선배에 대한 나의 신뢰나 경외심(?)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선물을 사줬던 선배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정작 선물을 해준 선배보다
그 음악을 '소개'해준 선배가 지금까지도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결국 같은 해 9월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당연히 학회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1년 후 다시 돌아갔을 때는 그 학회 회원들도 모두 바뀌어 있었고,
어렵게 부활됐던 학회가 1,2년 정도 밖에 후배를 더 받지 못한 채
어렵게 부활시켰던 그 학회의 명맥은 다시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함께 세미나를 했던 그 선배나 동기들과
어쩌다 학교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인간적 관계의 끈들마저 불가피하게 느슨해진 뒤에도,
이병우만은 줄곧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그 선배가 더 이상 소개를 해주지 않아도
내가 그의 앨범을 들으면서 음악적 갈증이 더 생겨
그의 다른 음반들도 내 손으로 사게 되었고,
그가 비엔나와 미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열었던
첫 콘서트에도 나는 어느 새 가서 앉아 있었다.
첫만남에는 때때로 중개인이 개입되기도 하고,
그렇게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 역시
나에게는 남다른 추억으로 남게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억 속의 인물들이 삶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 역시 가끔 들춰보는 바랜 사진첩의 일부처럼 변하더라도,
결국 어떤 대상과 나와의 관계는 그 대상 자체에 대한 나의 애정,
그 대상이 지닌 기질이나 성격에 의해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병우를 나에게 처음 선물했던 그 선배에게도,
그를 소개해주었던 선배에게도 모두 고맙지만,
역시 이병우씨 그 자신에게 가장 고마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한결 같은 성실함으로 자아낸 좋은 음악으로
세상을 연주하고, 세상에 말 걸고, 세상과 이야기 나누며
그렇게 지금 살이있어 준다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해 있다는 것만으로.
이건 스노우캣이 팻 메스니 공연을 보고 온 후 남겼던 글의 일부였는데,
이병우를 향한 나의 마음 역시 그와 별반 다를 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스노우캣의 말을 빌려 마무리를 해 본다.
"이병우, 그가 세상에 제시하는 시선은 언제나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왕의 남자 OST 발매 이야기를 듣고 또 마음 한 구석이 사무쳐
괜히 옛날 기억까지 헤집어가며 이병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