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 읽었던 <오딧세이아>는 주인공 오딧세우스의 관점에서 읽으면, 10년 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딧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10년간의 귀향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게 이름을 묻는 여러 인물들이 결부된 수많은 상황들은, 역으로 보면, 제노포비아 (xenophobia), 즉 이방인 혐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낯선 존재에게 이름을 묻는 과정은 상대를 알아가려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명명과 규정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진짜 이름을 지워버리고 낯선 것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익숙한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 순응시키려 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사실 이름과 명예를 회복하는 영웅의 모험담만큼 그 책이 나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그것이었다. 낯선 존재들의 이름을 지우고 그들을 무화시키면서, 그것을 ‘이해’ 혹은 ‘규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무지와 폭력.
그 뿌리 깊은 폭력이 결국 삶의 온갖 영역 안에 파고들어, 때로는 인종주의로, 외국인 혐오로, 때로는 여성혐오로, 성차별주의로,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 차별의 이름으로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하나의 차별을 깨고 나아갔다고 선언하며 외형적 성취를 이룬 듯한 순간에도, 내면에 도사린 공포는 일상에서 혐오를 낳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런 폭력이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에 나오는 사건들이 한번씩 터질 때마다, 나는 이름을 되찾은 한 영웅의 위대한 여정보다, 이방인의 이름을 지우는 폭력이 일상화된 그 뿌리 깊은 관행으로써 제노포비아가 떠올랐다. 결국 낯선 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상의 관행이 끝나지 않는다면, 한 명의 오딧세우스가 이름을 되찾는 영웅적 여정을 아무리 기념해 봐도, 수많은, 이름이 지워진 이들의 삶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개인들의 투쟁과 성취를 기념하는 만큼, 이름마저 빼앗겼던 무수한 흑인들의 죽음들을 더욱 절실히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더 보태지 않을 일상의 변화가 갈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