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표지 디자인도 바뀌고, 개정되어 20권 세트로 새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박경리의 <토지>는 1969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25년 만인 1994년 마침내 완간되면서 나온 솔 출판사의 16권 세트다.
그해 10월에 완간이 되면서 아버지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세트를 사 주셨는데, 당시 내가 고등학생이어서 여전히 학기 중이었던 터라, 중간고사며 기말고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시험이 다 끝난 뒤에 읽어야 한다며 안방 옷장 속이었던가, 뭐 집안 어딘가에 숨겨 두셨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던 어느 주말에 그 책을 기어코 찾아내 읽기 시작하고 말았고, 그게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일단 한번 읽기 시작하니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부모님께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책을 빼 가지는 못하고 오로지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만 책을 꺼내서 자리도 옮기지 못한 채 그 숨겨둔 장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미친 듯이 책을 읽었던 게 기억난다. 부모님이 들어오시는 문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에 꽂아 놓고 재빨리 나가야 한다는 나름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ㅋㅋ 아마 마지막 몇 권은 결국 기말고사가 끝난 뒤에야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정신을 잃고 홀딱 빠져서 읽었나, 싶기도 한 기억이다.
그 이후 대학 때 한번 더 읽고, 분량이 부담스러워 다시 읽진 못했다. 그런데 왠지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지 궁금해서, 한번 더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