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issing Jessica Stein이라는 영화를 보면 연인이었던 헬렌과 제시카가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편안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관계지만 열정이 없어서 연인이라기보다 룸메이트일 뿐이라며
헬렌은 제시카를 '매몰차게 차'고 제시카는 제시카대로 울고불고 매달려 본다.
(언뜻 보기에 너무 잔인하기도 하고 비굴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에 솔직했기에 이들의 관계는 이후에도 훨씬 편안한 우정으로 재정립된다.)
그러면서, 친구인 듯, 연인인 듯 편안하고 이야기도 잘 통하는데,
(성적) 열정이 조금 부족한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냐며,
그거 하나쯤 빠져도 다른 게 좋으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 제시카에게
헬렌은 단호하게 외친다.
"I want the whole package!"
영화에서 쓰인 맥락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어떤 이유로
난 이 표현이 참 재밌었다.
어떤 관계, 어떤 상황, 어떤 삶을 받아들일 때는 정말 그에 연루된 모든 것을
통째로(whole package)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지적해주는 표현 같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식당의 뷔페 코너 같은 것이 아닌지라
입맛대로 골라서, 좋아하는 건 넣고, 싫어하는 건 빼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부분들이 이미 전제조건으로 존재하고,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삶에도
내가 실천하기 힘든 습관과 조건들이 놓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엉킨 채 존재하는 그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이 선택하는 삶에 자신이 원치않는 부수적 -어쩌면 필연적- 조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수긍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을 가능한 한 미리 고려해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2.
모두들 직접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요즘 벌어지는 촛불 시위에 대한 토룡마을 주민들의 정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것도 같다.
이명박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도나, 그 집회의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입장이랄까.
나도 뭐 비슷하다.
시위 문화가 바뀐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시위에 참가하는 층이 다양한 점도 눈에 띄고,
분명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그 명쾌한 구호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표면적이라거나 단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하면 만사형통"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쇠고기 수입 문제에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대미무역정책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그럴 거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하느냐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결정할 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소에게 소를 먹이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
구토가 날 정도로 '인간다운' 어떤 문화 전체(whole package)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해도 좋다.
광우병이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소에게 소를 먹여서 쇠고기의 생장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현대의 '소' 사육 방식은 소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쇠고기'로 태어난 별종의 생명(?)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기가 유통되고 수입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다시금' 절망하고 경악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우리는 다른 생명의 살덩이를 먹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식욕이, 고기를 먹겠다는 욕망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것이라 그런가.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30개월 미만의 소를 들여와 달라,는 요구는
여전히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30개월 미만이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이,
소보다 먼저 미친 인간들의 미친 발상에서 길러진 소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은,
그런 삶을 "통째로(whole package)"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그런 식의 삶에 방식에 대한 그 어떤 성찰도 하지 않겠다는 무력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대미관계를 생각해서 '불가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로 그 불가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택한 삶의 방식을
우리가 버리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촛불 시위가 어느 정도는 불편하다.
물론 전부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나의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광우병의 위험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소를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입안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히 그러할 뿐 아니라,
심지어 그조차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거론할 필요나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비록 그들 전부는 아니라 해도-
광우병 쇠고기를 키워서 먹고 있는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이고,
-꼭 광우병 쇠고기가 아니더라도-
소가 아닌 쇠고기로 태어난 존재들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 당연해진
우리 자신들의 삶 그 자체인데,
촛불 시위의 논조에서는 -문제의 시의성 때문인지 몰라도-
그런 문제제기가 이루어질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내가 거부하는 것은 30개월 이상된 소의 살덩이가 아니라,
그런 것을 키워내겠다는 발상을 하는 그 삶의 방식 전체(whole package)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온전한 삶의 방식 전체(whole package)"인데,
이런 것을 거부하고 이런 것을 원하는 건,
현사안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시대착오적 발상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