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 속 사랑을 보노라면 가끔 화가 치밀 때가 있다.
3초쯤의 검은 화면을 띄우고, 잠시 뒤 이어지는 "3년 후" "5년 후"라는 자막으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이별의 아픔을 너무도 무성의하게 "처리"해 버리고는
달라진 헤어 스타일 하나로,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가로놓였던 시간의 벽을
손쉽게 훌쩍 건너 뛰어 버릴 때 그렇다.
보송보송 앳되던 얼굴에 실제로 흘러간 10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비포 선셋>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그런 눈속임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10년 전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머리 모양을 하고
아무런 과장도 없는 소박하고 털털한 옷차림으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가로놓였던 시간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밟아가며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선다.
그들은 시간의 공백을 무성의하게 "빨리감기(fast forward)"한
일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러하듯이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태연하게
각자를 다른 시공간에 붙들어매는 현실의 무게 따위를 무시하는 식의 억지는 부리지 않는다.
왜 약속했던 그날 나오지 않았냐는 물음과
당신으로 인해 사랑과 관계된 어떤 것도 믿지 않게 돼버렸다는 원망으로
그들을 가로막았던 시간의 벽을 절실하게 확인한다.
하지만 원망이 깊었다는 건
그리움도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그들은 시간의 벽 앞에서도 끈질기게 견디어온 사랑의 흔적을
한 편의 소설과 한 곡의 노래에 고스란히 담아 수줍게 서로 앞에 내밀고,
어색하지만 진심어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10년 전 작은 레코드 가게의 음악감상실 안에서
수줍게 눈길을 피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처럼.
"만약 신이 있다면 그건 나나 너, 그 누구 한 사람에게 깃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에 깃들어 있을 뿐이고,
만약 세상에 그 어떤 종류의 마법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무언가를 나누려는
각자의 미약한 노력 안에 존재할 뿐"
이라고 말하던 <비포 선라이즈> 속 줄리 델피는
비록 자신이 10년을 지나오며 사랑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가 돼버렸다고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깃든 신의 존재를 믿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무언가를 나누려는 미약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변함없는 그녀 그대로였다.
그건 에단 호크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재회한 그들은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에단 호크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재회를,
질문을 던진 기자들의 몫으로 남겨뒀던 것처럼
아무리 영화의 감독과 작가가 원망스러울지라도,
그건 우리들 각자가 대답해야 할 질문일 것 같다.
그런데 그 대답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이 다시 자신들이 속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지라도
사랑과 낭만에 대해 비관적인 냉소주의자로는
결코 살아가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들로 하여금 사랑을 믿게 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게 충분하지 않았을까.
@ "비포선셋"에 관해 쓴 글에서
이 영화의 결말을 더 희망적으로 보는 벨로는,
내가 보기에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낙관적인 것 같다.
그에 비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는 나는
현실의 사랑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