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역시 'This American Life'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의문의 살인사건으로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이미 30대가 된 어느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 사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하거나, 혹은 종종 실화를 통해 접할 때면, 주로 자기 삶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끝까지 그 범인을 찾아내 마침내 일종의 'closure'를 얻게 되었다 혹은 삶의 한 매듭을 짓게 되었다,는 류의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 그것이 엄청난 중압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자신도 사건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나 증거물을 수집도 해보고,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훑어본 한 경찰관이, '이 사건은 정말 막다른 골목이에요. 당신은 할 만큼 한 겁니다.'라고 했을 때 정말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더 이상 그 사건을 파헤쳐 다시 오래된 상처를 헤집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그냥 살아계셨을 때 자신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추억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한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자신이고, 그 사람의 상실을 묻고 살아가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의 몫인데, 그냥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아버지를 누가 그랬는지 알아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마음에 한이 없겠어요?'라고 할 때마다 너무나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마치 그런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나 그런 한을 품지 않은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뭔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마침내 인정받은 듯해 기뻤다고 한다.
죽음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럴 때가 있다. 특히 누군가가 자살했을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그리고 설혹 적극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해도 뭔가 자신의 무관심이 그런 일을 부른 것은 아닐까,라는 자책감 같은 것에 괴로워하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 데뷔작인 '환상의 빛'이라는 작품은 바로 그런 상황을 다루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이 항상 그 고요함 속에서 뭔가 상식을 뒤집는 반전을 보여주었듯 이 작품 역시 그랬다. 누군가의 자살을 둘러싸고 그 죽은 이의 삶을 되짚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서사였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사고와 같은 누군가의 죽음이 어느날 있고,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물론 자살을 대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뭘 잘못했던 것일까, 때때로 괴로워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영화의 서사속에선 끝내 그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남겨진 이들은 그의 자살이 자신의 잘못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고, 다시 살아간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고투의 과정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화 속 자살은 마치 사고사나 자연사와 같았다. 자살이라고 해서 다른 죽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자살을 택한 사람에게 그 어떤 '불행'의 징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영화는 남겨진 인물들로 하여금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라는 그런 강박 없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게 했다. 죽은 자를 끌어안고 살다 그 죽음에 감염되어 삶이 곪아가게 하는 대신, 그 사람은 그저 살았다. 자살했던 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택했듯, 그 역시도 자기 생을 택했다.
앞서 언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속 주인공 역시도 그랬던 듯하다. 살인이라고 해서, 누가 내 가족을 죽였는지를 안다고 해서, 죽음이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당신 가족을 사랑하긴 한 것이냐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죽음은 정말 어떤 '원인'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순간 그야말로 죽음이 온 것, 그 자체가 그저 운명이 아닐까 하고. 어떤 형태의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다른 운명이겠지만, 죽음의 순간은 정말 그저 운명이 아닐까 하고. 그 누구도 탓할 것이 없는. 물론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 혹은 살인을 당하거나, 혹은 자살하거나,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떤 죽음의 '원인'이나 '이유'가 있는 것처럼, 그 병이나 사고, 살인과 자살이 죽음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그렇게 뭔가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원망할 대상이 있는 편이 더 편하다면, 그렇게 해서 죽음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원망 없이, 미련 없이 그런 죽음을 받아들인다 해서, 그 사람의 선택을 폄하하거나 사랑이 부족했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자신을 끝없이 탓하며 그 안에 침잠하지 않도록,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그리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온힘을 다해 통제력을 발휘하는 것.
죽음에 관한 문제는 종종 그럴 때가 있다. 특히 누군가가 자살했을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그리고 설혹 적극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해도 뭔가 자신의 무관심이 그런 일을 부른 것은 아닐까,라는 자책감 같은 것에 괴로워하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장편 데뷔작인 '환상의 빛'이라는 작품은 바로 그런 상황을 다루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이 항상 그 고요함 속에서 뭔가 상식을 뒤집는 반전을 보여주었듯 이 작품 역시 그랬다. 누군가의 자살을 둘러싸고 그 죽은 이의 삶을 되짚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서사였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사고와 같은 누군가의 죽음이 어느날 있고,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물론 자살을 대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뭘 잘못했던 것일까, 때때로 괴로워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영화의 서사속에선 끝내 그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남겨진 이들은 그의 자살이 자신의 잘못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는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고, 다시 살아간다. 물론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고투의 과정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영화 속 자살은 마치 사고사나 자연사와 같았다. 자살이라고 해서 다른 죽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자살을 택한 사람에게 그 어떤 '불행'의 징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영화는 남겨진 인물들로 하여금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라는 그런 강박 없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게 했다. 죽은 자를 끌어안고 살다 그 죽음에 감염되어 삶이 곪아가게 하는 대신, 그 사람은 그저 살았다. 자살했던 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택했듯, 그 역시도 자기 생을 택했다.
앞서 언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속 주인공 역시도 그랬던 듯하다. 살인이라고 해서, 누가 내 가족을 죽였는지를 안다고 해서, 죽음이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당신 가족을 사랑하긴 한 것이냐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죽음은 정말 어떤 '원인'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순간 그야말로 죽음이 온 것, 그 자체가 그저 운명이 아닐까 하고. 어떤 형태의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다른 운명이겠지만, 죽음의 순간은 정말 그저 운명이 아닐까 하고. 그 누구도 탓할 것이 없는. 물론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 혹은 살인을 당하거나, 혹은 자살하거나,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떤 죽음의 '원인'이나 '이유'가 있는 것처럼, 그 병이나 사고, 살인과 자살이 죽음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다. 그렇게 뭔가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원망할 대상이 있는 편이 더 편하다면, 그렇게 해서 죽음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원망 없이, 미련 없이 그런 죽음을 받아들인다 해서, 그 사람의 선택을 폄하하거나 사랑이 부족했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자신을 끝없이 탓하며 그 안에 침잠하지 않도록,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그리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온힘을 다해 통제력을 발휘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