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몸과 마음의 묵은 짐을 털어내는 일종의 의식처럼 지난 연말과 올초에 고향집 대청소를 하며 대대적인 짐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예전 편지들도 찾고 한바탕 정리를 하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좋아하고 존경했던 선생님들의 편지도 간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이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어서, 비록 그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정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짝사랑하다시피한 선생님이 항상 있었다. 물론 그분들 중에서도 특히 입시 교육과는 무관한,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정신이나 인류의 사회적 책임, 교과서적 지식을 넘어선 학문과 진리 추구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선생님들이 있었고, 그런 분들에 대한 존경심은 더 오래 남아서, 나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게 되셨을 때까지도 어떻게든 편지를 보내며 연락을 이어가려 했던 것 같다. 결국 지금까지 그것이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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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분은 중1 때 국어 선생님. 눈매가 조금 날카로운 인상인, 아마도 30대 정도로 비교적 젊으신 데다, 다소 엄격한 편인 여선생님이라, 여중이었던 우리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선 조금 무서운 분이라는 평판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수업 시간에 따로 언급하실 정도로, 깊고 넓은 문학의 세계로 처음 이끌어주신 분이었고,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마음 속으로 흠모했었다. (그렇지만 소심해서 막상 배울 때는 표현 잘 못했음.) 사실 좀 까칠하다는 인상 뒤에 감춰진 속깊음과 유머 감각이 있었어서, 지금 같으면 츤데레라고 표현했을 그런 성격이지 않았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겨우 한 해밖에 배우지 못했는데 선생님께선 이듬해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아마도 전근을 갈 경우, 그 당시엔 지역 신문에 인사이동 내용이 모두 실렸어서 어느 학교로 가셨는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해 여름엔가 무작정 첫 편지를 썼었는데, 이후 중3때까지 내가 편지를 보내면 몇 차례 엽서로 답장을 해주셨었다. 그 당시 엽서를 받으면서도, 선생님의 어른스러운 글씨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나도 그런 글씨를 쓰고 싶었는데, 그건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내가 그 당시 선생님의 나이 정도거나 이미 그 나이를 넘겼을 수도 있는 시점에 그때의 답장을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질이 다른 것 같다. 3,40대의 성숙한 지성으로 겨우 열너댓 살 된 아이가 쓴 편지가 뭐 그리 큰 흥밋거리였겠냐마는, 그런 것에도 성심성의껏 답장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뭔가 남달랐다고밖에 할 수 없다. 사실 이후로 만난 국어 선생님들은 이분만큼 좋았던 분이 단 한분도 없었고, 그냥 다들 입시 위주의 수업을 하는 교과서적인 분들이었던 터라, 이 선생님을 고등학교 때쯤 한번 더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가끔 했던 것 같다. 

2.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분은 고1 때 한문 선생님. 지금까지도 아마 그럴 테지만, 국영수를 제외한 과목들은 입시에서 비중이 낮은 탓에 수업이 일주일에 기껏해야 두 시간인가 세 시간밖에 없어서, 선생님 수업이 자주 없었던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이분도 연세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도, 키도 자그만했고 심지어 머리도 벗겨진 남자선생님이어서 학생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난 선생님이 좋아서 한문을 예습 복습까지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각 교과별 등수를 매겼었는데, 소위 주요과목에서 전혀 1등이 아니었던 내가 한문 1등이었던 것은 이 선생님에게 빚진 바가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본다. ㅎㅎㅎㅎㅎ) 그런데 어찌 보면, 당시 고등학생의 수준에서는 국문학 분야 안에 한문학도 있다는 걸 잘 모르기도 했고, 한글로 된 문학을 좋아해야만 국문과를 간다고 생각했던 탓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어쩌면 지금 한문 고전을 좋아하고 있는 단초가 사실은 이때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분은 바로 전근을 가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2학년이 되면서 한문 선생님이 바뀌어서 아마 더 배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후로도 한문 과목을 계속 좋아하긴 하고 열심히 했는데, 선생님을 이때만큼 좋아했던 경우는 없었다.

3.

마지막으로, 거의 내 학창 시절 선생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고2 때 국사 선생님. 당시 초등학생 딸이 있다는 말씀을 간혹 하기도 하셨으니, 그 당시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셨던 것 같고, 학생들 사이에선 다소 괴짜라거나 별나다는 평이 있던 남자 선생님이었다. 요즘은 오히려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도 있고, 공무원 시험 같은 데서도 필수적인 과목이라 그 비중이 더 올라가는 느낌인 것 같은데, 국사도 수능이나 내신에서의 비중이 그렇게 큰 과목은 아니었어서, (한문보다는 좀 나았지만) 수업 배정이 그렇게 많이 되는 과목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선생님들은 한문, 국사, 정치-경제여서 다들 비중이 낮았음...) 그런데 국사를 단순한 암기 과목 취급해서 가르치지 않으면서, 수업도 재미있게 하신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 와서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말씀을 하셨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사나 삶을 생각하는 태도나,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강조하는 말씀을 많이 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수업을 주로 하셔서 정말 좋아했었다. (지금 나이가 더 든 우리들에겐 진부하다시피 한 말일 수 있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나, "기다릴 무엇이 있고, 오래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삶의 깊이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씀 같은 걸 해주셨을 때, 그 시절엔 감동을 받고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학생들의 내신 관리를 너무도 중시한, 비평준화의 지방 고등학교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서술형 주관식 문제 같은 걸 시험에 출제하시고 그랬었다. 한번은 난이도를 너무 높게 출제하셔서, 전학년 통틀어 국사 성적이 제일 잘 나온 애들도 80점대에 불과했던 적마저 있었고, 심지어 그런 애들이 아마 열 명도 안 됐을 정도였을 거다. 지금처럼 내신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입시 환경에서는 오히려 더 퇴출 대상처럼 여겨질 선생님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내가 중고등학교 내내 가장 좋아했던 영화가 <죽은 시인의 사회>였는데, 거의 내 현실에 나타난 키팅 선생님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와중에 내가 막 국사 1등하고 그랬던 건 아니고, 국사를 좋아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엄청 눈에 띄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국사 선생님과 친밀해질 계기는 따로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해에 우리 학교에 처음으로 (교지나 학교 신문 등의 전통적인 활동 들을 제외한) 신설 동아리들이 생겼었고, 그 중 하나가 선생님이 담당하면서 직접 만들었던 '고적답사반'이었다. 말 그대로 옛 유적지를 답사하는 동아리였는데, 아무래도 지역 내에서 답사를 갈 수 있는 가까운 곳들이 한정이 되어 있다 보니 담당 교사였던 두 분의 선생님께서 직접 운전을 해서 학생들을 태우고 다니셔야 했다. 그래서 모집 인원이 8명인가, 6명밖에 안되는 동아리였고, 그러다 보니 시험까지 보고 들어 가야 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방과 후에 춘천 지역 내나 그 근방의 유적지들에 데리고 다니셨고, 심지어 선생님 덕분에 처음으로 비석 탁본이라는 것도 해 보고 그랬다. 그 당시 지방의 입시 학교 교사가 해야 할 일을 넘어서는 부분에서 정말 의욕적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 방학엔가는 직접 운전까지 해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 <대고려국보전>이라는 전시에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가기도 하셨다. 현재의 국립박물관이 지어지기 전, 김영삼 정권 때 구 총독부 건물이었던 당시 국립박물관을 붕괴시킨다는 결정이 나 있는 상태일 때였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 결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냐는 걸 우리들에게 물어도 보시고, 선생님의 의견도 말씀해 주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쨌든 선생님께서 이듬해에 전근을 가시기도 했고, 고3이 되면서는 이런 특별활동이 아예 불가능해졌으니, 그런 걸 경험해 볼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선생님 입장에서 날 좀 특이하게 봤던 계기는 아마도 내가 독서감상문 대회 같은 데서 입상을 했을 때였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것도 다들 입시 때 써먹을 수 있는 특기 사항이 되어 글쓰기 대회 같은 것도 많이 나가고 할 텐데,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최소한 지방에서 접할 수 있는 경로로는 그런 대회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어차피 그런 글 쓰는 건 입시 공부 외 활동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학생들에게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나마 나는 책 읽는 건 적극 권장한 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고등학교 때 <토지>를 다 읽었었고, 그해에 있었던 독후감 대회에 글을 써 보내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는데, 선생님이 그런 걸 좀 특이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이 상황과 맞물려 생각해 보면, 독서-논술이 중요해진 요즘 아이들보다 독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 차라리 나의 세대였던 것 같다. 몇 세 때, 몇 학년 때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필독서 같은 것이 없던 나의 학창 시절엔 도리어, 내가 읽고만 싶다면 무슨 책이든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난 고3이 되었고,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후에는 교내에서 또 다른 선생님을 좋아하기는 했다. (금사빠... ㅋㅋㅋ ) 짧게만 언급하자면, 이때 좋아한 선생님은 정치-경제 선생님이었는데, 진짜 너무 싫어하는 과목이고,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결코 재미있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뭔가 선생님이 되게 지적이라는 그런 이유였던 것 같은데... 과연...-- 선생님을 또 엄청 좋아하긴 했었다. 그럼에도 국사 선생님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3학년 때도 전근가신 학교로 편지나 선물을 보냈었다. 고3 때 선생님께 답장을 받은 건 딱 한번이었는데, 어쨌거나 나는 틈날 때마다 편지를 써서 한 해동안 다섯 통 정도의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대학 입학 후에 편지를 썼더니, 입학 선물로 윤동주 시집을 동봉한 답장이 왔었다. 아마도 고3 때 쓴 편지는, 입시에 시달리느라 힘든 와중에 토로하는 일시적인 생각이나 감정이라 계속 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가, 대학에 들어가서까지 편지를 쓰니까 좀 더 진지하게 대해주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이후로 2년 정도 서신교환이 지속되었고, 내가 CD를 선물로 보내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헌책방을 다니시다가 눈에 띄었다며  민족문화추진회(현재의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나온 고전 번역본이나, 인문학에 치우쳐서 자연과학적 소양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종의 기원> 같은 책을 선물로 불쑥 사서 보내주기도 하셨었다. ("오다 주웠다."의 원조격? ㅎㅎ) 게다가 선생님께선 다른 지방으로 옮기신 후에, 교사직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계속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불과 몇 년전까지도 지역 내 야학의 교장선생님으로 성인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역시나 내가 학창시절에 존경할 면모가 있다고 느꼈던 그런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신 훌륭한 분인 것 같다. 

기억나는 선생님과의 특별한 사건이라고 하면, 고3 때 수능과 대학 입시 시험이 끝나고 졸업식 전까지 시간이 있을 때, 학교에서 고3 학생들을 데리고 당일치기 통일전망대 여행 같은 걸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같은 날 선생님께서도 전근가신 학교에서 그곳 학생들을 인솔해서 거길 방문하셔서, 거기서 선생님을 마주쳐 기념 사진을 찍었었다. 아마도 내가 선생님 좋아한 걸 너무나 잘 알고, 나보다 먼저 선생님을 발견했던 내 친구들이 막 불러서 알려주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생님과의 편지가 끊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받은 답장까지도 가지고 있고, 실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도록 제안을 하셔서,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낼 때, 한 통은 보내고, 같은 내용을 공책에 베껴 써 놔서, 그 내용이 다 남아있기도 한데, 어느 순간 이렇게 뚝 끊어졌는지는 통 모르겠다. 헌데, 물론 내가 선생님과 부적절한 관계였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고, 선생님에 대한 마음은 순전히 존경심이었지만, 사실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그럴 때의 마음엔 일종의 "유사" 연애감정 같은 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어쩌면 이후에 연애라는 걸 처음 하게 되면서는 선생님께 편지를 쓸 일이 더 줄었던 게 아닌가 하는 짐작만 막연히 해 본다. (영양가 없는 연애보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더 소중히 하는 편이 좋았을 것을. 쯧.)

그러다 그 이후에 가끔 선생님이 떠올라서 연락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도 10년 이상 흐른 시점이라 과연 기억아나 하실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은 편지에 종종 내가 뭔가 엄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생각하시는 듯한 내용을 쓰기도 하셨었는데, 내가 과연 그런 기대에 부응할 만한 사람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지기도 했던 것 같다. 사실 대학 간 이후에 내가 쓴 편지들은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을 해놓았으니 됐다고 생각했다가 별도로 출력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고등학교 때 썼던 것에 비해 별로 남아있지 않긴 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읽어보면 진짜 손발은 물론,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진지함에다, 심지어 지금 나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부분마저 있어서 놀랍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선생님 편지를 읽으니 새삼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올라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그 시절에 그 선생님을 좋아했던 게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좋은 선생님이자, 좋은 어른을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올해, 혹은 몇 년 전에 정년퇴직을 하셨을 정도의 연세가 되셨을 텐데. 글쎄.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살다가 한번쯤 다시 연락을 드려도 괜찮겠다는 때가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Posted by papyrus

진부한 말이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최소한 초등학생 때부터 지적도 많이 받고, 스스로 의식도 많이 했던 나의 나쁜 습관 가운데 하나는 ‘벼락치기’였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매일 일정 시간 숙제를 하고, 복습이나 예습까지 마친다는, 마치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유니콘이나 용과 같은 엄친아와 엄친딸들에 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나는 항상, 줄기차게 벼락치기를 해 왔고, 지금까지도 근본적으로 고치지는 못했다. 그것은 과제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또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도 계속 나타나는 지독한 습관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 있어도 매일 일정 시간 동안만, 그것을 끊어서 읽는 사람은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지만, 재미있는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끝을 보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은, 벼락치기를 고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과제를 할 때 이 습관이 얼마나 지독하게 해로운 것인지는 매번 눈앞에 일이 닥쳤을 때마다 느꼈지만, 결국 항상 발등의 불을 간신히 끄고 한숨 돌린 후엔 그 악몽 같은 기억을 깡그리 잊는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이 습관은 지금까지도 내 몸에 붙어 있다.

사실 이것이 내가 호흡이 긴 작업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시간을 잘 안배해서 긴 기간 동안 일정하게 해온 작업이 쌓여서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게 하기엔 나는 벼락치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물론 이런 나 자신을 잘 아는 탓 혹은 덕에, 어찌 보면 그냥 단기간에 휘몰아쳐서 마치고 나면 끝나는 일을 주로 맡게 되고, 그렇게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나도 긴 호흡의 일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지독한 악습과 결별하기 위해 좀 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 보기는 한다. 실행까지의 거리가 얼마일까,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