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의도에 의한 선택으로든, 시간적 제약이나 실력부족으로 인한 실수든, 사실 번역에서 오역이란 불가피하다. 장면 전환 속도에 따라 글자수를 맞춰야 하는 영상자막 번역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하려는 지적질(?)은 결코 그 사실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서론을 달아둔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는 몇 가지 오역이 있었는데, 그게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보다, 이 영화가 표현하려 한 여성상과 관련된 중요한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나온 오역이라 더 거슬리는 면이 있었다.

처음 나온 건, 파티에서 춤추다 발목을 삔 메그를 자기 마차로 데려다 주면서 로리가 마치(March) 가를 처음 방문했을 때. 어수선한 집에 처음으로 와 보게 된 로리에게 마치 부인은 “Don’t mind the clutter, Mr. Laurence. We don’t.”(17:09')라고 말하는데, 국문은 “이해해줘, 로렌스 군. 원래 안 이래.”라는 골자로 번역이 됐다. 그런데 저 영문은 사실 “집이 어수선한데 신경쓰지 말아요. 우린 신경 안 써요.”라는 말이다. 번역 문장이 저 장면의 흐름상 크게 어색하진 않아 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사실, 맥락을 생각해 보면 '정반대로' 번역이 된 거다. ‘집이 오늘은 엉망인 것 같지만, 원래는 안 그렇다’라는 해명은 평소 집을 잘 관리하는 주부로서의 마치 부인의 역할에 방점이 있는 거고, ‘집이 엉망이지만 우리도 신경 안 쓰니까 신경쓰지 마요’라는 건,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다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사과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여성의 태도를 보여준다.

물론 이 대사 직전에 마치 부인이 “Apologies for the chaos: I enjoy baking in the middle of the night!”(난리법석이라 미안해. 밤중에 빵 굽는 게 취미라서.)(17:05')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도 ‘집안 꼴이 원래 안 이렇다’는 변명을 해야 할 필요를 표출한 부분은 없다. ‘밤중에 빵 굽는 게 취미’라는 추가 정보는 오히려 그런 생활이 일상이라는 부분을 더 강조한다면 강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원래 안 이래’가 아니라 오히려 ‘원래 이래’라든가 ‘늘 이러고 살아.’라고 하는 편이 맥락상으로 더 맞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 오역이라고 언급한 대사가 원작소설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음에도, 굳이 그레타 거윅 감독이 이 대사를 넣었을 때는 그런 여성의 태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넣었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오역은 더 뼈아픈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발견한 오역 역시 마치 부인의 대사였다. 장면은 바로 에이미가 학교에서 친구들의 성화에 선생님을 희화화한 그림을 그렸다가 체벌을 당하고 난 뒤, 집에 가면 야단 맞을 것 같아 돌아가질 못하고 로리네 집 앞에서 서성대다가 로리네 집에서 치료를 받은 후의 장면. 에이미를 데려가기 위해 (수줍음 많은 베스를 제외하고) 마치 가 여성들이 모두 로리네 서재로 우르르 들어와서, 체벌을 당한 에이미를 보고 한 마디씩들 한다.

그러는 와중에 마치 부인은 “You did wrong, Amy, and there will be consequences.” 라는 말을 했는데, 이에 대한 번역은 ‘네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은 거지.’(39:42')였다.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이에 앞선 상황에서 어머니는 아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체벌은 적절하지 못한 처벌방식이라 생각해서 앞으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다. 다만 에이미가 너무 의기양양해 하니까 ‘그래도 네가 잘못한 거니까, (엄마한테) 벌 받을 줄 알아.’ 또는 ‘그렇다고 네가 잘 했다는 게 아냐.’라는 의미로 그 말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 맥락이 있는 상황에서 ‘잘못했으니까 벌 받은 거지.’라는 번역은 어머니가 선생님의 처벌방식을 옹호하는 것 같아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문장이 분명 미래시제인데 그렇게 번역한 것은, 왠지 번역가가 나름대로는 자연스러움을 위해 택한 의도된 오역인 거 같기도 해서, 바로 앞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점이 더 아쉽게 느껴진 부분이었다.

이 두 가지 대사는 모두 여성을 대하는 당시 사회의 시선과 태도에 대한 비판이 담긴 것이어서 그 반대의 맥락으로 번역된 것이 더 불편했다.

그 외에 숙어의 뜻을 잘못 옮긴 경우 한 가지로, 조와 메그가 함께 연극을 보고 돌아와 배우의 연기에 대해 논평하는 장면. 조가 언니인 메그에게 언니가 훨씬 더 연기를 잘하지만, 그래도 그 배우가 기절하는 연기 하나는 잘하더라,라고 평을 하고, 메그는 그걸 받아서, “I wonder how she managed to turn white as she did.”(47:22')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영화에선 ‘근데 어쩌면 그렇게 피부가 하얗지?’라고 옮겨졌지만 ‘turn white’는 원래 ‘(낯빛이) 창백해지다’라는 뜻이고, 이는 바로 앞의 기절하는 연기를 잘 하더라,라는 평에 덧붙여, ‘어쩜 그렇게 창백해지지?’라는 말로 실감나는 기절 연기에 대한 칭찬을 한 것이다. 그걸 그냥 피부가 하얗다는 외모 칭찬(?)으로 바꾼 것은 아무래도 마땅치가 않다. 그리고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이 대사 역시 여성의 능력인 ‘연기력’을 칭찬한 건데, 그걸 외모 칭찬 쪽으로 바꿨다는 사실이 여성을 바라보는 제한된 시각을 은연중에 투영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에 짚을 건 앞서 언급한 것들만큼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문장의 뉘앙스를 잘못 파악한 것 같은 느낌의 오역으로, 로리의 대사다. 조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자긴 평생 결혼 안 할 것 같다고 하는 조의 말에 대해, 로리는 ‘넌 누군가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고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칠 거야. 넌 그런 사람이니까.’라고 말한 뒤, “And I’ll watch.”(1:39:22) 라고 한다. 이 문장은 ‘내가 지켜볼 거야.’라는 일종의 선언의 투로 번역됐는데, 사실 그보다 ‘난 (그걸) 지켜만 봐야겠지.’라는 원망과 체념, 씁쓸함이 섞인 뉘앙스에 가깝다. 이 부분에 상응하는 소설 원문인 “and I shall have to stand by and see it.” 또한 바로 후자의 뉘앙스를 담고 있고, 그걸 더 짧은 문장으로 담아낸 것이 영화 속 대사여서 이 뉘앙스의 차이가 좀 아쉬웠다.

물론 워낙에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데다 대사의 양도 많은 걸 감안하면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번역이 됐다는 건 알고 있고, 번역이라는 작업의 고충을 나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는 처지라 보통 오역 지적 글은 잘 쓰지 않지만 이 영화의 번역을 국내배급사에서 굳이, 혹은 별 자각없이 남성 번역가에게 맡겼다는 데 대한 아쉬움으로 이번만큼은 부러 이런 지적질을 한번 남겨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한 번역가가 전체 덩어리를 놓고 작업하는 것과, 이미 작업된 번역에서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결코 같은 에너지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가가 한 동일한 오역을 다른 번역가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가 다른 부분을 오역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다만 이 글에서 지적한 오역이 과연 남성 번역가의 시선이라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것이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영역일지라도, 여성 번역가에 의한 이 영화의 번역을 볼 수 없는 현재의 조건에서는 이 의문은 어쨌든 의문으로써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P.S.
이건 의역과 축자적 번역을 두고 치열한 고민 끝에 번역가가 내린 결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지적할 사항 한 가지 더.

메그의 결혼식 날 언니가 결혼해서 떠나는 게 싫다고 조가 결혼하지 말고 같이 도망이라도 가자고 하니, 메그가 너도 언젠간 결혼할 거라고 한다. 이에 조는 “I’d rather be a free spinster and paddle my own canoe.”(1:32:51')라고 대답한다. 이 문장은 “자유로운 독신으로 혼자 노 젓고 말지”라고 직역이 됐다.

“paddle one’s own canoe”가 글자 그대로 옮기면 분명 ‘스스로 노 젓다’이기는 한데, 이 숙어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한’다는 의미이니 “난 차라리 자유로운 독신으로 남한테 기대지 않고 살래.”라고 옮길 수 있었을 거다. 맥락상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직역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노 젓다’라는 표현이 우리말에 있는 속담도 아니고 보니, 이 문장이 국문에서 나오는 게 다소 생뚱맞고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번역이었다.

Posted by papyrus

 

학부 시절 읽었던 <오딧세이아>는 주인공 오딧세우스의 관점에서 읽으면, 10년 동안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딧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10년간의 귀향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게 이름을 묻는 여러 인물들이 결부된 수많은 상황들은, 역으로 보면, 제노포비아 (xenophobia), 즉 이방인 혐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낯선 존재에게 이름을 묻는 과정은 상대를 알아가려는 과정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명명과 규정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진짜 이름을 지워버리고 낯선 것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익숙한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 순응시키려 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사실 이름과 명예를 회복하는 영웅의 모험담만큼 그 책이 나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그것이었다. 낯선 존재들의 이름을 지우고 그들을 무화시키면서, 그것을 ‘이해’ 혹은 ‘규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무지와 폭력.

그 뿌리 깊은 폭력이 결국 삶의 온갖 영역 안에 파고들어, 때로는 인종주의로, 외국인 혐오로, 때로는 여성혐오로, 성차별주의로,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 차별의 이름으로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하나의 차별을 깨고 나아갔다고 선언하며 외형적 성취를 이룬 듯한 순간에도, 내면에 도사린 공포는 일상에서 혐오를 낳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이런 폭력이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에 나오는 사건들이 한번씩 터질 때마다, 나는 이름을 되찾은 한 영웅의 위대한 여정보다, 이방인의 이름을 지우는 폭력이 일상화된 그 뿌리 깊은 관행으로써 제노포비아가 떠올랐다. 결국 낯선 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상의 관행이 끝나지 않는다면, 한 명의 오딧세우스가 이름을 되찾는 영웅적 여정을 아무리 기념해 봐도, 수많은, 이름이 지워진 이들의 삶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개인들의 투쟁과 성취를 기념하는 만큼, 이름마저 빼앗겼던 무수한 흑인들의 죽음들을 더욱 절실히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더 보태지 않을 일상의 변화가 갈급하다.

Posted by papy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