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드라마 <연애시대>와 관한 글 아님. 오해 없으시길.
키드 님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포스팅을 읽다 보니, 나도 참 오랫동안, 자주 우리 나라 드라마들의 문제점이라고 느껴왔던 부분을 *벅벅 긁어주셔서* 심히 공감하며 *몇 자* 적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후적인 평가나 분석에 의한 것이겠지만, 매 시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사조"랄까,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영웅서사가 역사를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보통사람들의 위대함을 눈여겨 보는 시대가 있고, 거대담론이 삶을 이끌었는가 하면, 미시사에서 역사의 역동성을 발견하는 시대가 있다. 물론, 그런 반면, 삶과 역사의 섬세한 결 속에는 그런 "지배적 사조"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정의될 수 없는 독특함과 풍성함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런 특이성과 풍성함은 바로 그런 지배성이나 일의성 바깥에 존재해서 더욱 빛을 발하고,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또 나와 동시대인인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연애"의 서사로 점철된 시대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이를 테면, "연애의 시대"랄까. 키드 님 말씀처럼 "마지막 회나 처음 한두 회만 보고도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천편일률적인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드라마들에 *표면상의* 다양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보면 드라마들마다 주인공들의 "직업"이나 "시대상", "옷차림" 등에서 얼마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용을 쓰는지 모른다. 오스트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한 피아니스트와 섬마을 출신 로드 매니저 (봄의 왈츠), 피아니스트의 길을 접은 아쿠아리스트와 호주에서부터 날아온 전문 사기꾼 (어느 멋진 날), 대기업 기획실장과 용역업체 청소부로 일하는 연변 아가씨 (열아홉 순정), 부여국의 왕자님과 계루부 군장의 여식 (주몽) 등등 최근의 드라마에 나온 것만 대충 열거했지만 뭐, 일 년에 최소한 십여 개쯤 나타났다 지나가는 수많은 드라마 속에서 어지간해서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주인공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다양성의 표피에 눈이 어두워져 그들 드라마가 참으로 다채롭고 역동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주변에는* 별로 없다. 그 모든 다양성도 늘 하나의 코드, "장애를 넘어서는 절절한, 불굴의 사랑"으로 수렴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우리 나라 드라마들만 그런 건 아니다. 예전에 "트로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비슷한 글을 썼지만, 뭔가 다른 영웅서사를 기대하고 있던 나에게 그 영화에서 보였던 거라곤 우리 시대가 *편협하게* 상상하는 평면적 영웅상과 더불어, 억지로 끼워넣다시피 한 아킬레스의 *연애사*였다. 그 시대에도 나름의 방식대로 특별한 이성(이나 동성)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있었을 테지만, 사랑에 우선하는 다른 삶의 가치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식으로 역사적 특이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우리 시대의 시선을 투사해 균질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의 서사 틀 안에서는 그 어떤 시대의 정신도, 직업의 세계도, 사랑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는다.
욕하면서도 보는 전형적인 드라마 중독자인 내가 말하자니 참 염치도 없지만, 어찌 됐든 드라마에 일단 재미를 붙여서 보기 시작하면서도, "내용에 전제된 바로는 그렇게 능력있고, 잘 나가는 의사, 교수, 실장, 이사라는 사람치고, 어쩜 저렇게 회사에 붙어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밑바닥부터 시작한 험한 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한다는 애들이 저렇게 일은 한 꼬랑지도 안 하면서 어쩜 잘리기는 커녕, 용케도 윗사람 눈엔 들어서 특급승진들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 한 번쯤 안 해 본 사람 있을까. 그만큼 드라마에는 "일상"이 철저히 소거되고 오직 "연애의 열정"만이 남는다.
물론 현실에서도 사랑 앞에 눈 멀어 보고, 사랑을 잃고 울어본 사람들이라면 그 감정의 주체할 수 없는 진폭에 몇 번쯤 맥놓고 흔들린 적 있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 빠져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을 때도, 사랑을 잃어 끝간 데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을 때도, 직장에 나가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다른 사람들*과도 살아간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 갇힌 진공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그 와중에 비굴 모드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다루려면 무슨 드라마가 되겠는가 하겠지만, 이제 그 "보통의 삶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남다른 사랑"의 서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에겐 너무나 "진부하고 식상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라고 하면 뒤틀리고 비비 꼬인 운명의 장난과 그 모든 운명의 장난을 건너뛰는 장애물 경주라고밖엔 생각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지 말고 이제 우리에게 부디 매일매일을 숨가쁘게 살아가면서도 사랑에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을 돌려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