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ross the universe 

하루, 한 움큼

grey room 2006. 3. 10. 17:56

Red: I think it'll take years.
Andy: Years I got. What I don't have are the rocks.

_from "The Shawshank Redemption"


*****
"시간 없어."
"바빠 바빠."

시간에 쫓겨서 사는 우리들은
정작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하는 일에는
딱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는 데조차 인색하다.

<쇼생크 탈출>을 보며 절실하게 다가오는 건
그 영화가 전하는 자유를 향한 갈구, 자유의 의미만큼이나
양쪽 바지 주머니를 채울 한 움큼의 벽을 파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던 앤디(팀 로빈스)의 "꾸준함"이었다.

꾸준함,
그 말처럼 평이하고 심지어 초라하게까지 들리는
단어도 잘 없을지 모르지만, 그 단어만큼
일상의 한결같은 보폭을 표현할
다른 적절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자유든, 개인의 성공이든, 가문의 영광이든
그 끈질긴 일상의 성실함 없이 성취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든 레드(모건 프리먼)가 그랬듯
20년도 안 걸릴 일을 600년이 걸릴 거라 지레짐작하곤
하루에 한 움큼의 일을, 매일 하려들지 않는 것 같다.
벌써 그렇게 10년이면 해냈을 어떤 일을
300년 쯤 걸릴 일이라고 일찌감치 밀쳐둔 채
성취로부터 스스로 발뺌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 움큼씩 평생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만 있으면
뒤를 돌아볼 것도, 앞을 내다볼 것도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지레짐작하고
미리 발뺌부터 하지 말기.
하루에 일주일을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지도,
하루를 백지로 놔둔 채 시간의 쓰레기통에 구겨 넣지도 말고
하루에 딱 한 움큼씩만, 빠뜨리지 말고 살기.



Posted by papyrus

변화와 변질

review/music 2006. 3. 2. 17:55
어떤 대상이나 상대와 오랜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대상이
한 결 같은 모습을 간직해주길 기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체되길 원하진 않는다.
그 이율배반의 감정 안에서 우린 어떤 균형을 찾고 있는 건지.

요며칠 전에 미선이 시절의 조윤석을 좋아했던 것이 분명한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조윤석군이 루시드폴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지금은 "퇴보"를 했지만, 미선이 시절에는
참으로 좋았었다고 한 구절을 읽었다.

"루시드 폴"이라는 모습의 조윤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퇴보"라는 표현에 당연히 발끈하기야 하지만,
그 팬의 심정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지극히 일상적인 표현들로
심 장을 후벼파는 듯한 어구를 빚어낸
미선이의 "시간"의 가사 같은 걸 보노라면
그 블로거의 심정이 더욱 잘 이해가 된다:

이제 헤어졌으니 나를 이해해줄까
사랑없이 미움없이
나를 좋아했다면 나를 용서하겠지
미련없이 의미없이

 

무심한 마음의 소리 어서 흘러가라고
조금 더 힘들어질땐 편해 질수 있다고
내게는 무거웠었지 포기했던 시간들
아 직 나를 기억할까 그리움 같은 그대


하지만 지금의 폴이 "퇴보"한 모습이라고 하다니
아무래도 너무한다고 본다!)



우리는 어떤 사람-그것이 가수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에 대해
일정한 기대를 품는다.
그 리고 그 기대를 충족했을 때, "역시..."라는 만족어린
한 마디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더라도, 되뇔 것이다.

그 래서 애정을 품었던 그 대상이 "망가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것만큼 마음이 아픈 것도 없다.
나 역시 지금 당장, 지금의 루시드 폴의 모습에
"퇴보"라는 딱지를 붙이진 않지만,
그 이전에 애정을 품었던 대상이 "변화"된 모습이 아닌,
"변질"되었다는 이유로 실망하고 마음 아파하다
그 마음마저 식어버린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 만 실망과 결별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과 같은 이유로
애정을 품었던 대상이 변해갈 때는
-특히 어떤 사람의 예각화된 날카로운 개성을 사랑했던 경우-
그 사람의 모난 곳이 조금 다듬어지고 둥글어지더라도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변화를 수긍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애초에 애정이라는 것을 품게 한 그 대상의 예전 모습을
그리워하고 간혹 들춰보기도 하고, 역시 대단했어,라고
감탄을 하기도 하지만, 애정을 품었기에 단박에 내쳐버리지 않고
그 대상이 변해가는 이유를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태도가
변질된 정치가의 충직한 심복을 양산하는 것이나
본 질적으로 무관하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 정도의 차이는 있는 거라고
구차한 변명이나 하고 매듭을 지어볼 도리 밖에.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좋아했던 대상들이 변하더라도
그들을 쉽게 놓아버리지는 못하는
익숙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리라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Posted by papyrus